풀벌레가 내게 왔다 / 안경덕
멀티미디어 세상이다. 무슨 소리든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스마트 폰 하나로 다 들을 수 있다. 오른쪽 귀에 이상이 있고부터 자투리 시간마다 버릇처럼 유튜브 <자연의 소리> 앱에 귀 기울이게 됐다. 귀에 들리는 풀벌레 떼창을 부드러운 자연소리로 커버하려고. 바람 소리, 물소리, 빗소리, 새소리를 주로 듣는다.

코로나19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몸살처럼 슬그머니 침투해 온 코로나로 오랫동안 고생했다. 그게 다가 아닌 게 문제였다. 지치지도 않는 풀벌레들이 맨날 귀에서 24시간 울어 대기 때문이다. 이비인후과 의사가 권장한 이명 치료와 약 복용에다, 귀 근육 완화에 좋은 동작 운동도 소홀하지 않았다. 하나 아무런 진전이 없다는 이유로 치료를 두 달여 만에 포기했다. 기어코 나를 이긴 고질병의 이명이 어느새 턱 하니 자리 잡고 만 셈이다.

그나마 몇 달은 이명을 우리 집 뜰에서 들리는 풀벌레 소리라고 간주하니 견딜만했다. 그런데 풀벌레가 사라진 계절엔 잠이 깨는 순간 귓속을 헤집는 그 떼창이 몸서리쳐질 만큼 거슬렸다. 무관심 하려고 애쓰는 자체가 큰 스트레스였다. 소리에 저당 잡힌 밤이 점점 늘어났다. 손으로 귀를 막아봐도 되레 동지섣달 황소바람에 파르르 떨리는 문풍지 소리만 귀 안에 낭자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풀벌레 떼창과의 전쟁이 나날이 연속이었다고 할까.

그런 중 의사의 처방이 내게 죽비를 쳤다. 티브이 소리든, 음악 소리든 크게 들려야 이명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한, 핸드폰의 자연소리 중 <완전한 빗소리>를 아침에 일어날 때까지 켜놓은 채 잠을 자라고 한, 다른 소리에 이명이 묻히는 효력이 있다고 한 그 처방들이었다. 그걸 등한시하며 핸드폰의 전자파만 운운했던 게 병을 키운 데 한몫 거들었던 것 같다. 언제나 후회는 뒷북 치기다.

늦게나마 소리 치료에 애쓴다. 핸드폰의 여러 가지 <자연의소리>에다 상상하는 실제 자연소리를 연산 작용시키는 착안을 했다. 이를테면 시냇물 졸졸 흐르는 소리에 빨래터의 방망이 소리를, 빗소리엔 마른 땅이 젖어 드는 소리를, 바람 소리엔 처마 끝에 매달린 시래기끼리 몸 비비는 소리를, 새소리엔 선율 고운 악기 소리를, 나뭇잎 부대끼는 소리엔 잔잔한 파도 소리를 이입하는 방식이다.

그게 적중했을까. 이명으로 과민하게 부덕해져 놋그릇처럼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졌다. 그리고 강도가 더 높은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 큰북 치는 소리, 매미 소리의 이명도 있다니 풀벌레 소리가 그나마 나은 거라며 스스로 위안해서다.

수많은 소리 중에 섬찟해서 듣기 거북한 소리도 많다. 그 소리들은 귀청을 때리는 큰 소음이라고 미리 정지선을 긋는다. 그러나 막상 소리가 들리면 혐오스러운 물건을 볼 때처럼 몸이 움찔해진다. 만약 몇 분까지라도 멈추지 않는다면 소음에 혹사당해 지레 병이 나고 말 테다. 그런데 그 소음 또한 의식을 깨워 주는 거라고 생각을 바꾸었다. 소리를 마음으로 들으면 잡음도 아름다운 멜로디가 된다는 말을 강하게 믿어서랄까.

하나 작은 귀속에 얼마나 많은 풀벌레가 와글거리고 있는지, 어떻게 밤낮 울 수 있는지, 그리고 풀벌레 수명이 육 개월에서 일 년이라는 데, 높고 낮음과 음 이탈도 없는지, 내가 잠잘 때 몰래 기계음으로 전환했는지가 여전히 의문투성이다. 의학적 신체적 심리적인 문제라면 내가 풀 수 없는 숙제인 게 틀림없다. 그러니 곱다시 받아들여야 하는 의혹들을 애써 잠재우느라 밤잠을 설칠 때가 많다.

모든 사물에는 소리가 잠재해 있다. 소리는 자기 자신을 나타낼 때 꺼내 쓰는 도구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 그 물체가 가만있을 뿐이다. 사람은 울음소리와 함께 태어난다. 그 소리가 존재를 알리는 가장 큰 매개체다. 아기가 배고프고 몸이 불편할 때 우는 게 언어다. 엄마는 아기 눈빛만 봐도 퍼뜩 알아차린다. 그만큼 아기 울음이 엄마의 마음과 이어지는 견고한 연결 고리므로.

그렇다면 풀벌레는 왜 하필 내 귀에서 울까.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도 아닌 듯하고, 쌓인 한풀이도 아닌 듯하다. 칠십 년 넘게 귀가 건강했을 때 고맙다고 하지 않은 나를 혼내는 것일까. 아니면 풀벌레 떼창이 싫으면 나더러 귀를 닫으라는 뜻일까. 가끔 귀를 닫아야 할 나이지만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본다. 그러면 내 유년 시절 들판과 곤충을 좋아한 게 이유라면 더더욱 아니지 않은가.

어릴 때 친구들이랑 봄이면 쑥과 나물을 캐러 들에 쏘다녔다. 여름에 소 풀 먹이러 갔을 때 소가 뱃구레를 채울 동안 메뚜기잡이도 하고, 방아깨비로 디딜방아 찧는 놀이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풀벌레 소리도 들에서나 집에서도 다정한 자장가처럼 들렸다. 몇 달 동안 우는 청량한 풀벌레 소리가 무척이나 친근했다. 그 옛정으로나마 풀벌레들은 이제 제집으로 돌아가야 맞지 않겠는가. 안 가겠다고 버티면 풀벌레 소리에 담긴 진정한 정겨움마저 밀어낼지도 모른다.

‘풀벌레들이여 무슨 이유로 무단히 내게 왔느냐. 나는 무심결에 너희들을 받아들인 죄밖에 없다. 몇 년 동안 너희가 무진장 울어 나를 슬프게 했다. 무정하다고 하겠지만 이제 너희들 떼창에 무관심으로 일관해지면 좋겠다. 이대로 무심코 지내야 하는 건 무리지 않은가. 무한정의 울음에 무념하기에는 너무 고초가 커서다.

너희들은 무작정 울기만 할 게 아니다. 이제 울지 않겠다고 무언이라도 약속해 다오. 설마 너희들이 내가 무연해지길 바라는 건 아닐 테지. 나는 너희들의 집으로 되돌아가길 무던히 빌고 빌 테다. 이렇게 통 사정하는 내 마음도 무겁다. 너희들도 나와 무관할뿐더러 갑갑하지 않은가. 바깥세상의 푸른 하늘과 벗해 주는 바람이, 뭇 생명체들이 기다리지 않느냐. 내가 너희들을 미워하지도 않았고, 울음소리도 지겹지 않았다고 하면 내 말을 들어 줄는지. 그도 아니면 더 말릴 재간이야 내게 없지만 너희 울음에 노예가 되는 건 더더욱 원하지 않는다.

너희들 떼창이 잠자는 세포를 일어서게 해주었다고 할게. 또 옛 추억을 소환해 주어 고맙다고 할게. 그래도 내 귀에서 너희가 기어이 떠날 수 없다면 앞으로 나를 이보다 더한 시험에 들지 않게 하길 바란다. 그래 주면 이명으로 생기는 여러 가지의 불편함은 기꺼이 감수하고 너희들을 평생 나와 함께 할 친구로 생각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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