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강 / 최재선

쌀을 씻는다.

 

쌀이 되기 이전엔 나락. 나락 이전에는 볍씨. 볍씨의 눈이 싹을 틔우면 모로 자란다. 모는 커서 벼가 된다. 벼는 결속된 힘으로 비바람을 견딘다. 이뿐이겠는가. 흙 목욕하는 멧돼지의 가림막이 되기도 하고 이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기도 한다. 벼 한 톨 한 톨은 낮은 숲. 사람 사는 마을의 더러워진 공기를 푸르게 씻는다. 벼는 강줄기를 막지 않는 거대한 댐이다. 여름 한 철, 멋모르고 쏟아지는 폭우의 발걸음을 얼마 동안 붙잡아둔다.

시간은 가끔 추억의 수레바퀴를 달고 엽서같이 온다. 지금은 기계로 모를 내고 추수하지만, 예전엔 사람 손으로 일일이 했다. 모내기할 때면 마을이 온통 축제였다. 어린 나이에 모내기하는 집 논의 지번을 속속들이 꿰었다. 쌀밥 한 공기가 간절했던 시절, 기억의 회로에 절박함이 터를 잡았다. 밥때를 맞춰 어머니가 품앗이로 모내러 간 집의 들녘에 가면 쌀밥을 배불리 먹었다. 덤으로 받은 주먹만큼 큰 알사탕은 달다 못해 씁쓰름했다. 모내기하는 들판엔 노래가 멎지 않았다. 못줄을 잡은 사람의 “이 논배미 다 심으면”이란 선소리에 맞춰, 모심는 사람이 “저 논배미로 넘어가세. 어이야 어이야”라며 뒷소리로 호응했다.

벼는 주인의 발소리를 들으며 자란다. 벼가 익을 때 주인이 자주 들른 데로 고개를 숙인다. 벼 입장에선 자신을 키워준 사람에 대한 예절이랄까. 오랜 기다림은 그리움이 되고 오랜 그리움은 기다림이 된다. 기다림과 그리움의 어원은 발소리다. 발소리는 어머니의 심장이 뛰는 소리다. 결속된 힘으로 살아가는 벼도 누군가가 그리울 때가 있다. “잘 크구나. 이 자식들” 농부는 벼를 쌀 이전에 양육하는 새끼로 여긴다. 갓난아이는 엄마의 심장 소리를 듣고 사랑을 먹어야 건강하게 자란다.

어린 모는 물을 좋아한다. 아무리 가물어도 논바닥엔 물기가 남아 있어야 한다. 비를 내릴 줄 모르는 마른하늘을 품은 논배미마다 올챙이가 입을 크게 벌린다. 말을 배우지 못한 올챙이는 올갱올갱 옹알이를 한다. 벼 이삭과 이삭 사이에 그물을 친 거미는 빈 그물에 몸이 야윈다. 미꾸라지는 몸을 땅속 깊이 미끄럽게 비틀어 기상청 일기예보에 귀 기울인다.

비는 나뭇잎의 배꼽을 환히 드러내고서야 온다. 이런 모습을 보고 농부는 비설거지를 서두른다. 무턱대고 불쑥 찾아온 손 때문에 난감한 일을 겪은 사람은 비의 예의가 어느 정도인지 안다. 논바닥에 빗방울이 들으면 벼는 물론 벼에 붙어사는 생명은 축제를 치른다. 개구리가 비 목욕하면서 부르는 합창은 음표가 단조롭지만, 언제까지 들을 수 있을지 모를 노래다. 우렁은 물에 젖어 물컹해진 풀잎을 찾아 모처럼 외식을 푸지게 한다.

벼가 자라는 논배미는 단순한 논바닥이 아니다. 생태가 살아 숨 쉬고 문화가 계보를 잇는다. 추수한 벼는 곧장 쌀이 되지 않는다. 차가 한적하게 다니는 길가에 질펀히 누워 가실 볕을 받아들여 제 몸의 수분을 날린다. 볕을 고루 쐬려고 주인이 고무래로 다섯 선을 만들면 산에서 날아온 새가 소리표로 내려앉는다. 벼는 새 떼에게 껍질에다 까끄라기까지 기꺼이 보시한다. 길바닥에 있는 벼는 알곡에다 쭉정이, 흙먼지와 이런저런 벌레의 사체가 공존한다.

살다 보면, 맘에 든 사람만 곁에 두고 살 수 없다. 사람 사이에 묻혀 있어도 고독할 때가 있다. 먹고 싶은 것만 먹고살 수 없듯이 맘에 들지 않은 사람 사이에 있는 다리를 끊을 수 없는 노릇. 알곡 같은 이는 알곡 같은 이대로, 쭉정이 같은 이는 쭉정이 같은 이대로, 고루 섞여 살 수밖에. 사람뿐이겠는가. 우주에는 셀 수 없는 생명체가 존재한다. 이 가운데 쓸모없는 목숨이 하나라도 있을까. 잡초나 해충이란 말은 이런 의미에서 모진 모욕이다.

쌀이 세상 사람에게 외면받는 시절이다.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삶이 바위 같았던 때, 밥심 하나 믿고 살았던 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있다. 너무 잘 먹어서 몸에 탈이 나는 시절, 쌀밥은 탄수화물 덩어리란 누명을 뒤집어쓰고 천덕꾸러기가 되고 말았다. 우리 땅에서 자라지 않은 국적 불명의 먹거리가 우리의 끼니를 빼앗은 지 오래다. 자식같이 키운 벼가 비룟값이나 농약값도 건지지 못하자 벼를 갈아엎는 농민도 있다. 평생 땅에 기대며 살아온 땅에 대한 믿음이 깨진 탓. 땅에 대한 신뢰나 믿음을 알맹이로 여기고 살아온 사람에게 절망은 쭉정이와 같다.

밥때는 단순히 도돌이표의 끼니가 아니다. 한솥밥이란 이름으로 모인 이름은 누구나 식구가 된다. 알이 토실하게 들어찬 볍씨가 알알이 모여 가족별자리로 빛난다. 문안이 부재하고 뜸한 시대에 “밥 먹었느냐?”라는 말처럼 따시고 살가운 인사가 또 있던가. 쌀을 씻는다. 뽀얀 강이 묽어지다가 마침내 맑아진다.

 

쌀 익는 냄새가 지느러미를 펼치고 유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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