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모르는데 / 곽흥렬 

 

아버지로부터 새벽같이 전화가 왔다. 집에 가서 필요한 물건들을 좀 가져오라시는 것이다. 잘 알아들었다고 대답은 해 놓고, 혹여 급한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일순 놀랐던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혼잣소리로 투덜거린다.

'노친네가 참 잠도 없으시지. 이 이른 시간에 뭔 큰일이나 났다고….'

아침을 뜨는 둥 마는 둥, 서둘러 당신 살고 계신 집으로 달려가 말씀하신 것들이 빠지지 않도록 나름대로 꼼꼼히 챙겼다.

쇼핑백을 아버지 앞에 내놓으며 눈치를 살핀다. 아버지는 가져온 물건들을 굼뜬 손놀림으로 꺼내 보시더니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듯 표정이 일그러진다. 혹시 또 뭐가 빠졌는지 조심스럽게 여쭤보았다. 대답 대신, 그렇게 남의 말귀를 못 알아듣느냐며 버럭 역정을 내신다. 이번이 벌써 몇 차례인지 모르겠다. 당신의 주문에 내 심부름은 번번이 빗나갔다. ​

아버지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병상에 발이 묶인 지 반년이 지났다. 한 주에 한두 번씩 시간 날 때마다 가는데도 아버지에게서 수시로 필요한 것들을 가져왔으면 좋겠다는 전화가 온다. 아버지 혼자 따로 거처하던 집에 들러 당부하신 물건들을 나대로는 면밀히 챙겨 간다고는 하지만, 늘 당신 마음을 흡족히 채워 드리지는 못한다. 당자인 아버지로서도, 생각은 번 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얼마나 답답하실까.

어저께 하신 부탁은 이랬다.

"큰방에 가면 여름 바지와 티셔츠 옷걸이에 걸려 있을 것이다. 그것하고 서랍장에 넣어 둔 면도기 좀 챙겨 오너라."

나는 큰방을 샅샅이 뒤져서 아버지가 일러주신 것이다 싶은 물건들을 가져갔다. 하지만 나대로는 ​성의껏 챙긴 것 같은데 오늘도 또 하방을 짚고 말았다. 당신께서 심부름 시킨 것들이 아니라는 말씀이었다. 하기야 그도 그럴 것이, 큰방에는 아버지가 지목하신 것과 똑같은 물건은 눈에 뜨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그 대신 비슷한 것을 가져왔노라고 둘러대었다.

아버지는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듣더니 참으로 딱한 위인이라며 혀를 찬다. 나이를 그만큼이나 먹었으면서 큰방, 작은방도 하나 못 구분하느냐며 나무라시는 아버지에게 나도 내심 서운한 마음이 없진 않다.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큰방'을 두고 둘 사이에 생겨난 오해 탓이다. 아버지는 당신께서 거처하시는 방을 큰방이라고 하셨다. 그에 반해 나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 방 옆에 붙은, 방 크기가 큰방을 그 방으로 알아들었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 소통의 벽이 가로막혀 있었던 게다.

사실 따지고 보면 충분히 그럴 만도 하겠다 싶은 생각도 든다.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큰 방은 집안의 가장 어른이 되는 사람이 거처하는 방이라는 뜻이었고, 내가 생각하는 큰방은 규모 면에서 넓이가 제일 너른 방이라는 판단이었다. 언어에 대하여 아버지의 생각이 관습적이고 상징적인 관점의 해석이었다면, 나의 생각은 현실적이고 지시적인 관점의 해석이었다고나 할까. 어쨌든 결과적으로 나는 아버지의 그다지 어렵지 않은 심부름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한 불초한 위인이 되고 말았으니, ​나이를 헛먹었다는 당신 말씀이 그리 틀린 소리는 아니지 않은가.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나도 나대로 억울한 면이 없지 않다며 스스로를 변호한다.

살다 보면 때로는 내가 나를 모르는데, 하물며 나도 아닌 남의 속마음을 어떻게 정확히 헤아릴 수가 있을 것인가. 거기서 서로 간에 의사가 바르게 전달되지 못하고 때로는 불가피한 오해도 생겨나는 것일 게다.

도둑은 남이 꼭꼭 숨겨 둔 귀중품까지 귀신같이 찾아내거늘, 나는 당자가 거기 있다며 세세히 가르쳐 주는데도 그 일상적인 것조차 옳게 찾지를 못하니 아버지 말씀마따나 참으로 우둔한 위인일시 분명하다. 사람이 이리 용렬하니, 하물며 가슴속에 든 상대의 마음을 도둑질하는 것이야말로 나로서는 또 얼마나 지난至難한 일이겠는가.

지금부터라도 이 타인의 마음을 훔치는 일에 어설픈 시동을 걸어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엉뚱한 오해가 생겨나지 아니하도록 좀 더 깊이 헤아려 살피는 지혜를 길러야 할까 보다. ​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