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차 / 정재순

 

막차에 몸을 실었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 열차 안은 하루 일을 갈무리한 사람들로 한가롭다. 누군가는 떠나고 어느 누군가는 돌아가는 길이리라. 빈자리에 기대 창밖을 내다보노라니, 사춘기의 일화 한 토막이 밤풍경처럼 스쳐간다.

여고생 시절, 여느 날과 다름없이 책가방을 들고 집을 나왔다. 골목을 걷는 동안 머릿속에서 딴 생각이 슬그머니 일었다. 큰길에서 머뭇거리던 내 발길은 어느새 학교가 아닌 반대편으로 향하고 있었다. 며칠째 계속 이어지는 살얼음판 같은 집안 분위기가 마음을 외돌게 만들었다. 그날따라 학교도 도서관도 나를 잡아두지 못했다. 무작정 걷다보니 동대구역 앞이었다.

떠나고 돌아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눈앞에서 쉼 없이 교차했다. 다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내가 꿈꾸는 세상이 어디쯤엔가 있을까. 호기심과 체념이 뒤섞여 일단 떠나려고 마음을 먹었으나 딱히 갈 곳이 없었다. 대합실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온갖 상념에 잠겼다. 주머니를 탈탈 털어 동전까지 세어보았다. 요금표를 한참 살펴본 다음 가진 돈에 맞춰 마산행 비둘기호 티켓을 샀다.

기차에 올랐으나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까봐 창밖만 바라봤다. 한 아주머니가 커다란 보퉁이를 짐칸에 올리더니 내 옆자리로 왔다. 아주머니는 삶은 계란 한 꾸러미를 사서 내 손에도 한 알 건네주었다. 자신은 서문시장에서 물건을 떼어 집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학교에서 공부할 시간에 기차를 탄 이유가 궁금했던지 이것저것 물어왔다. 엄마가 불치병에 걸리는 바람에 내가 얼른 돈을 벌어야 동생들을 뒷바라지할 수 있다고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그런 내가 측은해 보였는지 아주머니는 자신을 따라 가자고 했다.

종착역인 마산에 도착했다. 사람들 틈에 끼어 개찰구를 빠져나왔다. 함께 타고 온 사람들이 제 갈 길로 뿔뿔이 흩어졌다. 갈 곳이 없는 나는 무거운 옷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앞서가는 아주머니가 미더웠다. 이리저리 구부러진 길을 지나 십여 분 걸어서 시장 안 옷가게에 이르렀다. 젊은 여자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훑었다. 아주머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자는 또 쓸데없이 이런다며 투덜거렸다. 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쭈뼛거리자 그녀는 되알지게 닦달을 했다. 쫓겨날까 봐 조바심이 났던 나는 고개가 땅에 닿을 듯 수그렸다.

아주머니가 말없이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으나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여자는 아주머니를 더 다그쳤다. 구석에 앉아 눈치를 보던 나는 그만 엄마생각이 나서 눈물이 봇물 터지듯 흘러내렸다. 아주머니가 집에 돌아가고 싶으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주억거렸다. 아주머니는 판단이 섰는지 서두르기 시작했다. 기차가 끊기기 전에 역까지 바래다주겠다며.

가을 밤바람이 음산했다. 어두컴컴한 거리에는 정체 모를 여자들이 군데군데 서있었다. 아주머니가 발걸음을 멈추더니 뒤따르던 내 손을 잡았다.

“아가, 저기 봐라. 잘못하다간 큰 일 난 데이.”

라며 꼭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지금은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할 때이니 학생의 길을 벗어나지 말라며 나를 타일렀다. 아주머니는 앞만 보고 걸었지만 나는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이 깊어가는 역은 적막했다. 한쪽에서 술 냄새가 훅 풍겼다. 낡은 의자에 어떤 아저씨가 널브러져 있었다. 몇 발짝 다가서자 노숙자는 인기척에 움찔댔다. 순간 역한 냄새가 났다. 머리털이 쭈뼛 섰다. 그 사이 아주머니는 내 차표를 사왔다. 동대구역으로 바로 가는 기차가 끊겨 삼랑진에서 갈아타야 한다고 했다. 빵과 우유까지 챙겨 주신 아주머니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저만치에서 손을 흔들다가 내가 탄 기차가 출발하는 걸 보고서야 돌아섰다.

'잠시 후 동대구역에 도착하겠습니다.' 무사히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에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잰걸음으로 달려간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귀가하지 않은 나를 찾아 친구 집으로 수소문하러 가고 아무도 없었다. 근심에 싸였던 식구들은 나를 보자 얼싸안았다. 마음을 가라앉힌 나는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소상히 이야기했다. 다들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집안은 예전보다 따뜻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나는 더 이상 일탈하지 않았다.

내가 초등생일 때, 시골에서 도시로 이사 온 우리가족은 철길이 가까운 곳에 첫 둥지를 틀었다. 기찻길 옆은 기차소리로 늘 시끄러웠다. 차츰 귀에 익어갔다. 낮이면 열차가 오지 않는 틈을 타 또래들과 레일 위에 올라 중심잡기 놀이를 했다. 아지랑이가 아른거리는 평행선 위로 사라져가는 기차를 보며 미지의 세계를 꿈꾸기도 했었다.

집으로 달리는 차창에 내 모습이 어린다. 덩달아 아련한 추억이 머릿속에 얼비친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슬아슬한 감상에 사로잡히곤 한다. 당시 나는 세상에 어떤 위험이 있는 줄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였다. 옆자리에 앉은 아주머니가 온정을 베풀었기에 별일 없이 제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탈선하지 않도록 나를 잡아준 것이다.

기차는 내일도 있다. 하지만 막차는 필요한 사람에게는 마지막 기회가 되기도 한다. 내가 출발 시간에 늦지 않게 막차를 탔듯, 오늘 돌아가야만 하는 사람에게 막차는 간절하다. 삶도 이와 같아서 기회를 한 번 놓치면 다시 거머쥐기란 당최 어렵다. 인생에 주어진 소중한 기회를 놓치려는 내 손을 잡아 막차에 태운 아주머니는, 철길 위에서 만난 따뜻한 동행이었다.

떠나고 돌아오기 위해 길을 만든다지만, 세상에는 궤도를 벗어나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가끔은 그 길에서 헤매기도 하나, 세상과 사람을 배워가는 과정이리라. 정해진 시간을 달리는 기차가 있기에 나는 오늘도 바깥일을 끝내고 무사히 막차에 올랐다. 돌아오는 길은 이렇듯 편안하다. 하루 여정의 종착역은 가족이 있는 집이다. 차창 밖의 환한 불빛이 푸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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