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필이 "노마드의 혼"이라고 여긴다. 노마드의 혼이므로 제 자리에 머무를 수 없다. 그냥 손품과 눈품과 발품을 팔며 달빛 비치는 철야의 원고지 위에서, 상상의 풍차를 찾아 바람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다. 바람을 참지 못하는 그들처럼 나도 노마드의 날개를 달고 외로운 곳으로 숨어들고 싶다. 비가 내리는 저녁, 보름달이 뜬 밤, 어둠에 묻힌 검은 바다를 보면 로맨틱한 전율을 체험하고 싶다.
작가에게 소중한 것은 고행의 신발뿐이라는 믿음으로 노트와 펜과 물병 하나 보탠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고 밖으로 나간다. 콧바람을 쐐야지, 뒷등에도 바깥바람을 집어넣어야지. 그러면 묵은 가지에도 꽃을 피우리라.
수필집을 내려고 작정했을 때, 솔직히 내 글 수준이 걱정이었다. 명색이 교수인데 《월간 에세이》로 등단한 주제에 '고 정도밖에'라는 말을 들으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청탁이 오는 대로 넙죽 넙죽 받아서 자판을 두드리는 가운데 글 편 수가 들었다. 문학이 나를 끌고 온 것도 아니건만 어정쩡한 글에, 맹추 같은 글뿐이었다. 중국 고사에 나오는 연燕나라 사람이 제 걸음걸이를 잊고 조趙나라 걸음걸이마저 배우지 못한 신세가 나였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첫 수필집 발간을 강행해 버렸다.
독자의 검열을 두려워하지 않는 《작은 사랑이 아름답다》가 그 수필집이다. 많은 작가들이 이중 자아를 드러내는 방법으로, 자기 치유의 방식으로 수필의 문으로 들어선 것은 아닐까. 아무튼 내 삶을 벗겨보자고 하였다. 거창하고 반짝이는 것을 쥐려는 세상에게 작은 것이 소중하다는 심통 아닌 심통을 부리려는 만용도 있었다. 무엇보다 내 손과 발처럼 작은 것도 한 번은 제값을 한다는 인정을 받고 싶었다. 그래서 일상적인 작은 삶의 일면을 모았다.
나는 지금도 수필은 작은 개울이거나 작은 모퉁이라고 여긴다. "Little is Beautiful", 그 말을 첫 화두로 선친의 유품, 마루 밑에 자리한 섬돌, 돌담에 핀 접시꽃, 고추밭 생가터와 같은 주변 물상을 이야기로 풀어냈다. 지금 들여다보니 유치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지만 글을 쓸 때는 그지없이 절실하고 절박했다. 그럼 되는 거지. 보들레르가 "신이여, 지켜보기에는 너무나 역겨운 상처의 밑바닥까지 응시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라고 했던 기도처럼 말이다.
첫 수필집을 낸 후 눈이 밖으로 향했다. 나이 쉰, 첫 번째 수필집을 낸 3년 후에 두 번째 수필집 《풀꽃처럼 불꽃처럼》을 냈다. 풀꽃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살다가 불꽃처럼 확 쓰러지겠다는 오기를 서문에서 밝혔는데 지금 생각하면 글 장난의 극치인 셈이다. 아무튼 그때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를 즐겨 읽었지만 외람되게도 내가 생각한 이름을 불이려 하였다. "이름 있는 것에 다시 이름 붙이기"를 두 번째 화두로 삼았으니 지금 생각하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무렵 나는 작가는 언어 노동자라고 믿기 시작했다. 해달이라는 동물이 있다. 해달은 납작한 돌을 배 위에 올려놓고 조개를 그 위에 내리쳐 살을 꺼내 먹는데. 그의 갈비뼈는 그 충격을 견뎌낼 정도로 단단하다고 한다. 글 쓰는 사람도 해달이 조개를 깨기 위한 고통을 감내하듯 묵묵히 가슴을 깨어 글을 낳는 사람이지 싶다. 속살 같은 감성을 발라내는 작업이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많아졌다. 글쟁이라면 문학이라는 이무기 동굴로 들어가는 것도 괜찮다 싶다. 쉰 나이게 수신도 못하면서 지천명을 꿈꾸었으니 어찌 됐겠는가. 당연히 '풀꽃처럼 불꽃처럼'은 '잡풀처럼 잡목처럼'이 되어 버렸다.
호주에서 돌아와 네 번째 변신을 했다. 그것은 '부드러운 직선'으로 은유된 문학적 변신이다. 호주에서 날마다 본 나무는 직선으로 지조를 세우고 나뭇잎으로 곡선미를 이룬 생물이었다. 시류에 굴종하는 자들에게 직립의 귀감을 가르치고 자신보다 낮은 존재에게 둥지를 제공하는 은자隱者였다. 나는 그게 그냥 좋아 보였다. 덧붙이면 절망에 빠진 작가들에게 반드시 뜻을 이룬다는 것을 알려주는 형상이었다. 글 싸움만큼 즐거운 행위가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하며 펴낸 것이 수필선 《서 있는 자》이다. 수필도 강물처럼 부드럽지만 속으로는 비수 같은 척尺을 지녀야 한다고 썼지만 결과는 별로였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마흔 편 골랐더니 '좋은 수필사'에서 내어주었다. 발표한 것을 첨삭하고 수정하고 고친 것들이 다수이다. 인간이나 글이나 아무리 퇴고하여도 미완의 텍스트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으니 수필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다섯 번째로 《길을 줍다》를 출판하였다. 삶이란 무엇인가? 왜 나는 글을 써야 하는가를 자문하는 초심으로 회귀하여 쓴 책이다. 쉬지 않고 걷는 것은 물이라고 말한다. 나는 물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걸어가는 것이라고 여긴다. 산과 들을 지난 강물이 여행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품을까를 생각했다. 그래서 조잘대며 우는구나, 그래서 어둠 속에서는 더욱 흐느끼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시려졌다. 나도 아직 울 수 있구나, 그래서 글을 아직 쓸 수 있구나 하는 가능성에 안도하면서 나보다 앞서 길을 걸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줍자는 심정으로 인간열전 식으로 써 보았다. 그 글에 밀레의 그림을 연상하면서 '길을 줍다'라는 제목을 얻었다. '인생 줍기'가 다섯 번째 화두다. 세상에 별난 이야기가 있는가. 그냥 사람 사는 이야기를 주웠다. 허리를 굽혀야 줍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얼마의 세월이 흐르지 않아 한국펜본부 이사장단 선거에 덜컥 관련되었다. 그냥 글만 쓰자, 남들이 부러워하는 교수직에 조금은 인정받는 수필가에 문학평론가가 되었으니 여기서 욕심을 더 부리면 안 된다. 문단 직책의 명예는 다른 사람들이 가져야 한다는 평소의 생각이 완강한 외압에 굴복당하였다. 설상가상 내가 지금까지 써온 수필이 과연 옳은가라는 생각과 수필평론을 쓰면서 굳어져 버린 내 감성이 불쌍해졌다. 방향 전환이 필요했다. 내 글이 가까이 오도록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 글이 그들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내가 살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부드럽고 가볍게 상처를 다독여야 모두의 아픔이 낫는다고 믿게 되었다. 내 삶을 진솔하고 말하면 그들이 그들 사이에 나를 끼워 주리라는 기대감으로 펴낸 여섯 번째 수필집이 《손이 작은 남자》이다.
그동안 다른 일도 많았다. 상도 더러 받고 평론집도 더러 내고 수필도반과 함께 공부하는 기쁨도 누리고 있다. 고맙기만 하다. 무엇보다 수필인생의 길로 돌아온 것이 더없이 기쁘다. 길은 오가는 통로이므로 앞서 간 발자국에서 내 길을 찾았듯이 누군가 내 발자국에서 제 길을 찾았으면 하는 희망을 갖는다.
마침내 정년을 맞이하였다. 교수로서 평생을 보내면서 늘 고맙기도 했지만 문학인으로서는 결코 만족스럽지가 못했다. 수필을 쓰고 수필 평론을 하고 수필가로서 못하다는 소리를 듣지는 않았지만 작가는 늘 작가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무엇보다 달라져야지 하는 내적 용감을 따르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 글이 쌓였다. 칼럼, 실험수필, 에세이, 서정수필, 평론 같은 수필, 퓨전수필, 기행수필, 단수필…좌충우돌, 천방지축, 횡설수설 같은 글 무더기가 늘어갔다. 이걸 어떡하나, 버리느냐 보듬어 안느냐 하는 상이에 '그냥' 써버리지 하는 마음과 '그래도'하는 욕심이 충돌하는 《일곱 번째 성좌》를 내게 되었다. 또 책 한 권이 만들어졌다. 수필가로 행세한 지 30년의 자괴심 속에 태어난 못난 자식이다. 아무튼 내가 썼으니 내가 안아야 하는 글이 아닌가.
그래도 곰곰이 생각하니 이전과 다른 뭔가가 있는 듯하다. 사물을 입체적으로 보고 내 신세 같지만 세상 이야기를 담았다. 이런저런 일에 부딪치며 살다 보니 스토리텔링의 어조로 인생 풍경을 풀어내는 것도 재미있겠다 싶다.
하지만 마침표가 아니고 쉼표이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글의 길에 발을 디딘 지 올해 23년째이다. 시인이나 소설가에 비하면 연륜이 짧지만 수필가로서는 적잖은 햇수라고 생각한다. 마흔 살에 늦깎이 등단을 하면서 내 운명의 길을 발견했다. 당선 통보를 받은 그날 연구실 문을 잠갔을 때처럼 지금도 나는 습관처럼 문을 걸어 잠근다. 어둠이 내 존재의 이불이고 적막이 내 영혼의 시트라고 여긴다. 그럴 때면 더없이 happy, 幸福, 행복,^^하다.
내가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문학 따로 삶 따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학이 삶이요, 삶이 문학이다, 몸 전체를 붓 삼아서 인생이라는 돌벽에 벽화를 그려나가는 행위 그 자체이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작가가 죽는 대가로 우리가 얻는 것은 독자의 탄생이어야 한다."고 했다. 문학은 외롭고 의로운 자들의 몫이라는 생각이 내 수필 바닥에 깔려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런데 고상한 고독이면 참 좋으련만 한심한 자족에 머물러 있다.
그래도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왜 글을 쓰는 시간만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들까. 왜 또 다른 성좌를 찾아 떠나고 싶을까. 딱히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수필이 내 운명이라는 사실이다. 수필이 있어 살고 사랑하고 죽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난 늘 이렇게 묻는 걸 좋아한다.
왜 수필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