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사이더 / 김진진

 

차선과 인접한 한길 구석에서 잡곡을 파는 중년 여인이 있다. 평범한 얼굴에 허름한 차림새로 늘 있는 둥 마는 둥 해서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행주치마를 겸하여 납작한 쑥색 전대를 허리에 둘러메고 앉아 작은 그릇에 이런저런 곡식들을 담아 판다. 한쪽 옆으로 조그만 콩나물시루와 두부도 보인다. 종종 그 앞을 지나다 보면 비들비들 말라 그리 실하지도 못한 잔챙이 더덕을 까느라 골몰해서 고개가 반쯤 꺾여있기 일쑤다. 한 뼘도 안되는 소쿠리에 담긴 하얀 더덕을 보면 그래서 조금은 슬픈 냄개가 맴도는 듯하다. 때때로 그것이 도라지로 바뀔 때도 있다. 발치에 널린 껍질들 너머로 추위를 달래주는 건 고작해야 둘러쳐진 종이박스 몇 개와 비닐뿐이다. 아주 가끔 술에 절은 사내 하나가 멍하니 풀린 붉은 눈을 하고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얹혀 있다.

언제부터 그곳에 자리를 잡았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불현듯 시야에 들어와 팥이나 서리태, 보리쌀, 찹쌀 등속을 사주다 보니 서로가 별말 없이 눈인사를 나누곤 한 것이 8~9년 정도이다. 하루 일을 끝내고 주변 가게들이 슬슬 문을 닫을 무렵까지 그러고 앉아 있으니 오죽 고단할까 싶다. 딸린 애들은 또 어떡하나 싶기도 하고. 별나지 않고서야 사는 건 다 마찬가지니 그 형편을 미루어 짐작할 뿐, 일부러 팔아주기가 절반이다.

찬바람이 쌀쌀하던 어느 해 가을밤에 못 볼 꼴을 보고 말았다. 우연히 그 앞을 지나는데 낯익은 사내가 우당탕 그릇들을 집어던지고 난동을 피워댔다. 흩어진 수수며 조 따위가 어둑한 불빛에 드러나서 무심한 인파의 무게에 짓눌렸다. 여인을 향해 쏟아지는 사내의 육두문자와 우악스러운 발길질. 나는 얼른 그 자리를 피해 못 본 척 다른 길로 돌아갔다. 그것이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하여. '쯧쯧. 남편이란 사람이 조금만 도와주면 수월할 텐데, 대체 왜 저러나. 못난이 같으니라고.' 그 후로 여인은 사라지고 없다. 그 자리에는 낯선 철제 포장마차가 떡하니 들어서 있을 뿐.

두어 달 지나 큰길 건너편 시장에서 볼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다 무심히 고개를 돌리는데 그녀가 시장 끄트머리에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연립주택과 전봇대 사이 지극히 비좁은 공간에. 빛바랜 파라솔 하나를 달랑 천장으로 삼고 비닐을 둘러친 속에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들어앉아 있다. 여인과 나는 또 일 년여를 오가며 예전 그대로 별말 없이 지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바람이 불어도. 하지만 날씨가 아무리 화창해도 일요일에는 그 여인을 볼 수가 없다.

겨울 추위가 얼마나 드센지 크리스마스를 지나 반갑잖은 감기가 찾아왔다. 연말이라 이래저래 피곤했던지 몸이 신호를 보내는 모양이었다. 며칠을 견디며 지내다 할 수 없이 병원을 거쳐 지름길을 통과하는데 이번에는 그 여인이 한적한 주택가 입구에 앉아 있다. 무슨 이유인지 시장 끄트머리에서도 조금 더 밀려나 있다. 그냥 지나치다 발길을 돌려 두부를 한 모 사려는데 무턱대고 세 모를 사고 만다. 참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계산을 끝내고 돌아서려는데 "잠깐만요." 하면서 불러 세운다.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니 두부 한 모를 따로 싸서 내민다. "제 선물이에요. 마음의 선물." 거듭 사양을 해도 부득불 내미니 거절하는 것도 어째 이쪽 도리는 아닌 듯싶다. 얼결에 받으면서 보니 두부를 받쳐 든 손이 거칠게 투박해서 거뭇거뭇 새까맣다. 나는 어쩐지 미안한 마음에 내 손을 감추다시피 하고 고맙게 잘 먹겠다는 말을 전한다.

집에 와서 두부를 어떻게 처리할까 생각하다 겸사겸사 작정하고 휴일에 만두를 만들었다. 그런데 식탁에서 가족들이 맛있게 먹을 때마다 새록새록 여인이 건네준 선물이 머릿속을 떠다닌다. 마치 몸속 어딘가 한 군데가 맺힌 것처럼. 짠한 무엇이 이상하게 돌아다니며 마음을 편치 못하게 만든다.

아마 그로부터 보름을 훌쩍 지나 여기저기 불빛들이 밝게 켜진 저녁 무렵이었다. 여인이 있는 근처를 지나다 슬쩍 보니 고등학생이나 새내기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앳된 청년이 무릎 위에 사각 쟁반을 올려놓고 뚝배기를 들여다보며 혼자 열심히 식사 중이다. 옆으로 쭈그려 앉은 그 여인은 가까이 다가가도 누가 지나가는지 의식도 못한 채 연신 청년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독거린다. 새끼를 지닌 어미만이 지닐 수 있는 순한 눈빛. 나도 모르게 마음이 일렁거린다.

가던 걸음을 재촉하다 문득 만두집 앞에서 멈추어 선다. 그리고 김이 펑펑 나는 만두와 찐빵을 2인분 사다가 슬며시 내미니 화들짝 놀란 여인이 이내 환하게 웃는다. 나도 덩달아 웃음이 가득 번진다. 음력 동지섣달인데도 어쩐지 마음은 한없이 따뜻하고 후련하다. 어둑한 길을 걸어가자니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갈 때마다 무심히 던지곤 하던 말씀이 불쑥 떠오른다.

"얘야. 이 다음에 커서 장에 가거든 , 한데 나앉은 사람들 물건부터 사주도록 애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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