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무시무시한 동물들이다.
분홍 코끼리를 통째로 삼킨 보아 구렁이처럼 벌러덩 드러누웠다가 서서히 꿈틀거린다. 묵직한 똬리를 풀어 지붕 위로 기어오르거나 땅을 짓밟고 깔아뭉갠다. 쓰러뜨린 담장에 걸터앉아 거드름을 피우며 생색내는 놈도 여럿 보인다. 하나같이 먹잇감을 잔뜩 움켜쥐고, 더 갖고 싶은 본능으로 무수히 뻗어나간 뿌리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다. 스펑나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앙코르 와트의 따프롬사원이다.
크메르 왕조의 최대 전성기를 맞았던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기리기 위해 창건한 불교 사원이다. 하지만 지금은 나무들의 제국이다. 다양한 수목들이 이웃으로 살아간다. 지체 높은 거목들의 위용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 기기묘묘하게 생긴 나무뿌리들이 소리도 없이 장악해, 닥치는 대로 붕괴시키는 괴력을 과시한다. 이들을 통치하는 늙은 왕도 있다. 단연코 스펑나무다. 완강한 기세에 제압당한 유적은 혹독한 시련과 고초를 겪고 있다.
우람한 나무들은 승천을 꿈꾸는가. 지상으로 솟구친 뿌리가 하늘을 기둥처럼 떠받치고 있다. 우듬지도 허공에 매달려있다. 허공이 불안하다. 군데군데 부서진 검은 돌들이 어지럽게 나뒹군다. 제대로 남아있는 건물이 없다. 황폐하기 이를 데 없는 풍경을 두고 '지극한 슬픔에서 파격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는 누군가의 말에 깊이 공감하며 비장미에 빠져든다. 소멸된 왕국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파괴한 주범이 천재지변이 아니고, 인간이 아니고, 한낱 식물이라는 사실로 미뤄볼 때 기이하고 낯선 풍경은 경외감마저 든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이토록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상징도 드물 것이다.
고온다습한 날씨다. 새파란 하늘에서 난데없이 회오리가 일어서고, 먹구름이 덮친다. 창졸간에 굵은 빗방울이 떨어진다. 한무리의 여행객들이 '통곡의 방'으로 뛰어든다. 왕이 사별한 어머니가 그리워 목 놓아 울고 싶을 때 찾아와서 대성통곡했다는 효심이 깃든 장소다. 이곳은 그나마 나무의 지배에서 벗어나 있다. 펑 뚫린 천장으로 빗줄기가 쏟아진다. 누가 우는가. 온몸으로 오열을 터트리는가. 빗소리에 정체 모를 기척이 느껴진다. 봉쇄수도원 같은 세상살이에서 이런 방 하나 가진다면 닫히고 막힌 벽 없이 소통할 수 있으리라는 염원을 실어 가슴을 두드려본다. 방은 이내 커다란 공명통으로 변하고, 둥둥 울리는 북소리를 내면서 호곡을 한다.
스콜이 기습적으로 강타하는 틈을 타 왕과 그의 모후가 강림하는 것은 아닐까. 이들의 현현하여 스펑나무로 하여금 여행자들의 발길을 불러들이고, 가난한 나라의 아픔을 덜어주는 것이리라. 거대한 톤레샵 호수의 황톳물을 마시는 수상 마을들, 관광버스가 도착하는 곳마다 우르르 몰려와 구걸하는 아이들, 하얀 맹그로브꽃으로 만든 화관을 씌워주는 순박한 뱃사공들, 흙먼지 날리는 먼 길을 숙명인 양 싣고 달리는 뚝뚝이 기사들이 이 땅의 슬픈 후예들이다. 그들의 간절한 기도가 생전의 왕과 그 어머니를 애타게 부르짖는다. 모자母子의 눈물로 컴컴한 땅속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지상으로 뻗쳤을 비련의 나무들이 말을 걸어온다.
무너진 담벼락을 껴안고 나무뿌리 하나가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다. 금방이라도 툭, 하고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릴 것만 같다. 거칠거칠한 뿌리를 손으로 만져보니 웬걸 유순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진저리 치듯 몸을 빠져 달아난다. 나무는 잦은 폭우와 이글거리는 태양을 제 안에 번갈아 들이자니 속은 무르고 뿌리만 비대해졌다. 그냥 나무가 아니다. 한 나라의 역사를 전언하고, 사라진 왕국을 일으켜 세우는 수목들이다. 나무뿌리가 가지는 역동적 조형성에서 이 나라의 언어인 크메르 문자를 닮았다. 벽면에 부조로 남아있는 아득히 먼 기억의 편린들. '임금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그 자신의 고통이 아니라 백성들의 고통이다.'라는 군주의 애민정신이 뿌리를 통해 영생하는 것이리라. 제가끔 정령이 깃든 나무들이 하늘과 땅을 교접하는 대자연의 가교 역할을 한다. 다시 나무를 올려다본다.
사원과 스펑나무, 한 몸이 되어 밀림의 세월을 동행한다. 나무는 악착스레 사원을 파고들고, 사원은 떠밀어내면서도 기꺼이 품을 내어준다. 희로애락의 감정을 온몸으로 표출하면서 서로의 영역을 공격하거나 침범한다. 꼬이고, 비틀리고, 뒤엉킨 채로 벌이는 격렬한 몸싸움은 그들 삶의 방식이다. 길을 찾아 나서는 공존이요, 공생이다. 그러고 보니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으면서도 헤어지지 못하고 애증의 세월을 살아가며 힘겹게 뿌리내리는 이 땅의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입으로는 원망과 탄식을 쏟아가며, 할퀴고 부대끼는 등 모난 감정을 내보이면서 달래고, 어르고, 쓰다듬는 손길에 체념하듯 버텨내고 참아내는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들의 모습이다. 이렇듯 불편한 관계로 동고동락하는 것은 함께한 세월의 정리情理와 연민 때문이 아닐까. 질기고 질긴 연줄이다. 지극한 사랑이다.
왕의 근엄한 목소리로 내리던 장대비도 그쳤다. 어머니를 향한 효성이, 후손에 대한 자비가, 벼랑 끝 돌 틈에서도 초록 풀씨를 틔우는가. 벌판을 달려와 거친 숨을 몰아쉬는 바람을 와락 끌어안은 나무가 지는 해를 배경으로 쓸쓸한 표정을 짓는다. 붉게 타는 석양을 바라보기 위해 마흔여섯 번이나 의자를 옮긴 어린 왕자가 머문 소혹성이 이랬을까. 노을에 한눈팔다가는 분홍 코끼리처럼 잡아먹힐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놔두자니 바오바브나무처럼 커져 언제 파열될지도 알 수 없다.
그래서일까. 사원을 파괴하는 나무가 그 파괴를 막아내는 방편이라는 기막힌 사실이 놀랍다. 성장억제제를 투여하면서 인위적으로 생명을 유예하는 나무들, 제 의지대로는 키 한 뼘도 늘릴 수 없고, 살고 죽는 일도 그렇다. 꼬옥 쥔 손을 놓으면 발목 잡힌 건물도 함께 무너지기 때문이다. 서로를 길들인 동반자적인 관계가 아름다우면서도 슬프다. '누군가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은 눈물을 흘릴 일이 생긴다는 것인지도 모른다.'던 어린 왕자의 말을 곱씹으며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다. 빛과 어둠을 동시에 품고 있는 나무뿌리로 아기를 안고 구걸하는 백발의 소녀가, 뱃사공이, 또 다른 그들이 줄줄이 걸어 들어간다. 저만치 깊고 푸른 밤이 오고 있다. 오늘 날씨는 비 온 후 갬이다. 긴 소강상태에 들어가는 백 년 후에도 너와 나, 우리는 이렇게 사랑할까.
스펑나무야, 고맙고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