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부 한 모 앞에 두고 / 허정진

 

밤새 불린 흰콩을 맷돌로 곱게 갈아낸다. 어처구니를 힘들이지 않고 다루는 여유가 삶의 근력처럼 믿음직스럽다. 가마솥에서 천천히 끓여가며 알갱이가 몽글몽글해지면 베자루로 비지를 걸러내고, 뽀얀 콩물에 간수를 살짝 뿌려 서서히 순두부를 만든다. 그 덩어리를 틀에 넣어 누름돌로 눌러주면 물이 빠지고 두부가 완성된다. ‘두부 만드는 일은 게으른 며느리에게 맡겨라.’는 말처럼 오랜 과정을 꾹 참고 지켜보며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야 가능한 일이다. 그것이 곧 장인정신이다.

오일시장 귀퉁이에 오래된 두붓집을 들렀다가 두부 한 모를 사 왔다. 속이 꽉 찬 것 같은 하얀 속살이 자기 생의 이력서 인양 오지고 탱탱하다. 뭘 해 먹을까? 된장찌개에 숭덩숭덩 잘라 넣으면 좋겠지만 오늘은 그냥 부침이나 해서 먹을까 망설여진다. 그러고 보니 두부로 할 수 있는 음식이 무척 다양한 것 같다. 두부전, 두부탕, 두부보쌈, 두부조림, 두부전골, 두부샐러드 등등.

부드럽고 촉촉하며 고소하다. 무미하고 덤덤해서, 담백하다는 말이 원래 두부 맛이었던가 싶다. 두부 자체만으로도 훌륭하지만 특별한 색깔도 냄새도 없는 두부는 다른 재료들과 원만하게 조화를 잘 이룬다. 방아깨비나 고수처럼 자기만의 특이한 맛과 향을 고집하지도 않고, 파프리카나 홍당무처럼 강렬한 원색으로 자기주장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천성이 순하고 수더분해서 매사에 순응하고 순종한다. 뼈가 없어 칼도 덩달아 부드러워지고, 갖가지 모양내기도 요리사의 마음에 달렸다. 무슨 요리를 하든, 어떻게 살점을 베고 떼어내든 이래도 “응”, 저래도 “응”하는 목낭청이 따로 없다. 오상아(吾喪我)며 무념무상(無念無想)이다. 눈에 보이는 뼈는 없어도 ‘자아’라는 내공이 단단히 들어앉아 어떤 칼날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존심 때문에 모서리는 존재하지만 젤리처럼 말랑말랑하다. 겉으로 보기에 단호하고 날카로울 뿐 모서리가 있어도 모나지 않아 한 번도 누군가를 다치게 한 적이 없다. 취급하기 좋으라고 벽돌처럼 네모지게 만들었지만 누군가 원한다면 동그랗게, 붕어빵 모양도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영혼과 본성이지 겉모습이나 형태가 진정한 실체가 아니라는 모양이다.

나를 지탱하기에 내 무게, 내 부피면 족하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최적의 조화로움 그 자체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위에도, 아래에도 함부로 위치하려 하지 않는다. 내 존재의 밀도가 지나쳐 남이 무너지거나, 남으로 인해 내가 손상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누구나 자기 자리에서 자기 본분을 지키며 제 삶에 충실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물렁물렁하고 내구력이 약한 것을 일컫는 관용어로 ‘두부살’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어릴 때는 자식들이 하나같이 두부처럼 물러터졌다고 아버지가 안타까워하신 적도 있었다. 어디 가서도 손해 보지 않고,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차돌 같은 아들을 기대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세상을 물컹하게 살까 봐 두부 안 먹고 자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때는 교도소 출소자가 받아 드는 첫 먹거리로 생두부를 사용했다. 단백질을 보충한다는 뜻도, 흰 두부처럼 깨끗이 속죄한다는 이미지도 있었다고 한다. 박완서 작가의 수필 <두부>에서의 답이 그럴듯하다. “징역살이를 속된 말로 ‘콩밥 먹는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 출옥한 이에게 두부를 먹이는 까닭을 알 것도 같다. 두부는 콩으로부터 풀려난 상태이나 다시는 콩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두부는 다시는 옥살이하지 말란 당부나 염원쯤으로 되지 않을까.”

아무런 독도, 날카로움도 없어 목구멍 너머로 넘기기에 편하다. 단백질이 필요한 승려나 채식주의자의 식물성 치즈이고, 조상님들을 목숨처럼 받드는 조선시대 제사상의 중요한 제수(祭需) 중 하나였다. 고려말 이색의 <목은집(牧隱集)>에 이 없는 늙은이가 먹기 좋은 음식이고, 먹을 것 많은 요즘 젊은이들에게 열량 낮은 다이어트 식품이기도 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최선과 최적만 골라 으깨어 논 듯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함이다.

형체는 없어져도 콩이 가진 본성은 잃지 않는다. 불가마 속 항아리가 뜨거움을 견뎌 존재를 드러내듯 콩이라는 형상에서 탈피하여 전혀 다른 물상으로 변한 것이 두부다. 자신을 희생하고서도 주연이든 조연이든 탓하지 않고 부드럽게 서로 어우러져 하나 되는 법을 일깨워 준다. 주변의 김치든 된장이든 끓일수록 그 속에 스며드는 두부는 세상에 융화와 통섭을 주는 매개체가 아닐까 한다.

세상을 당당하게도, 부드럽게도 살지 못했다. 남들에게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들이 신발 속 모래알처럼 불편하고 버석거렸다. 밖으로 드러내지 못한 감정을 겹겹이 껍질 속으로 감추려고만 들었고, 조그만 충돌이나 불화에도 배반감을 느끼며 담을 쌓기 일쑤였다. 채워졌다가 비워지는 일들에 익숙하지 못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내어주지도, 나를 죽여 누군가의 배경이 되어주지도 못했다. 두부로의 변모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줏대 있는 콩이나 되는 것처럼 자신에게만 충실한 자존감이 문제였다.

두부 한 모가 누구에게는 보잘것없는 재료일지라도 또 누구에게는 한 끼의 식사이고 한 때의 목숨이 될 수도 있다. 부재료든 주재료든, 간단하든 공든 요리든 간에 허한 뱃속을 채우기에 그만한 음식도 없다. 빈약하지도 고급스럽지도 않고, 낯설거나 까다롭지도 않은 친숙한 음식이다. 계절도, 유행도 없이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나 좋아하는 고향 같고, 어머니 같은 음식이다.

그나저나 저 두부 한 모로 뭘 해 먹을까? 한참 망설이다가 결국, 그냥 끓는 물에 두부를 통째로 삶아 묵은김치에 막걸리 안주를 하기로 했다. 뭐로 해 먹든 간에 두부처럼 순하고, 이물 없고, 낮은 자세로, 겸손한 삶을 이참에 좀 깨닫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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