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진文鎭 / 허춘자 - 한탄강문학상 은상

 

 

 

베란다로 들어온 바람에 책장이 펄럭인다. 문진을 찾아 누르려다 반구 모양의 문진을 집는다. 손끝으로 차가운 감촉이 전해진다. 조심스럽게 문진을 책장 위에 올려놓자 종이가 눌린다. 이제 바람이 불어도 페이지는 제자리를 지킨다. 책장이 고요해지고, 오직 바람 소리만이 방 안을 맴돈다.

 

문학 송년회에서 선물 받은 문진이다. 작은 선물이 내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반구 모형인데 투명한 유리 재질로 만들어 뉴 클래식 연출했다. 원형 바닥의 이미지는 크기가 다른 갈잎들이 소복이 깔리고 그 위에 붉게 물든 단풍잎 한 장이 떨어졌다. 어른 손가락을 굽히면 손안에 쏙 들어오는 크기다. 문진을 감상하다가 옛 생각에 빠진다.

 

밤섬으로 가족 놀이를 다녀온 날 밤, 아버지는 먹을 갈고 화선지 위에 옥빛 거북 문진을 올렸다. 푸른빛 거북 등에는 아버지의 시간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밤섬의 미루나무 길과 집 서너 채, 강물 위에 낚싯배 한 척을 띄웠다. 그리고 바람이 전해준 글을 적었다. 그림은 대청마루에 걸려 오래도록 자리를 지켰다. 아버지의 거북 문진은 또렷이 그날 밤을 기억했다.

 

아버지는 사법 대서소를 운영했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라서 손으로 써서 각종 집문서나 땅문서를 묶었다. 아버지의 손 길이가 길어지는 밤에는 수많은 문서와 씨름했다. 공문서를 대신 써주는 일은 정확해야 했다. 서식에 맞게 법리에 맞게 써야 하기에 아버지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글을 쓰기 전 아버지는 문진을 한참 바라보았다. 들끓는 감정이 글을 덮치려 할 때면, 문진이 감정을 차분히 누르게 기다렸다. 쉽게 풀어내려는 말들이 성급하게 흘러나오려 할 때면, 문진은 서두름을 제자리에 돌려보냈다. 잡념들이 날아올라 마음을 흐트릴 때면 문진은 그 혼탁함을 가라앉혔다. 아버지께 문진은 도구가 아닌, 바람에 날리는 생각을 누르는 진정제와 같았다.

 

아버지는 틈만 나면 문진을 매만지며 닦았다. 그것은 단순히 도구를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까지 달래는 의식이었다. 진사(鎭砂)는 종이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속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생각과 화가 난 자신의 감정도 차분히 가라앉혔다. 아버지는 자신을 누를수록 매사에 차분해졌다.

 

나의 인생도 아버지를 닮아간다. 문진이 있으면 들뜬 감정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아버지가 느꼈던 감성과 글의 무게까지 물려받고 싶다. 아버지 문진이 상기시켜 준다. 나의 심성에 올려 고집을 버리고 감정이 글을 덮치지 못하게 차분히 누르며 기다리라고. 아직도 어려운 상황을 만나 마음 한구석에 지글거리는 분노가 쉬이 가라앉지 않을 때 다시 아버지의 문진 냄새를 맡아본다.

 

아버지의 문진을 들어 진압(鎭壓)하고 바라본다. 백지 위에 묵직하게 자리 잡은 산처럼 침묵의 표상으로 나를 지도했다. 침묵의 동반자가 되어서 밤이 깊어 책상에 앉아 글을 쓸 때면 고요한 존재감으로 나의 글쓰기와 동반했다. 밤이 깊을수록 문진은 더욱 빛났다. 오랜 시간 나의 글을 지켜본 동반자로서 그것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나의 이야기가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나는 이제야 안다. 아버지가 글을 쓰기 전 그토록 오랫동안 문진을 바라본 후에 종이에 문진을 앉혔다. 단지 종이가 흩날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글쓰기라는 거대한 바다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단단히 누르고 서기 위한 의식이었다. 바로 그 문진이 세월이 흘러 이제는 내 손 안에 문진이 들어왔다.

 

사람에게도 이런 문진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 들뜬 마음을 적절히 누르고 흩어질 듯한 생각들을 잡아주는, 그러면서도 무겁지 않은, 어쩌면 우리는 서로의 문진이 되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매 순간의 다짐은 뉘우침의 반복으로 쌓인다. 가족과 친지에게 적당한 무게로 서로를 지키며 또 지켜지게 살아가고 싶다.

 

이제 내 책상 한편에는 두 개의 문진이 있다. 현대감각이 배인 반구 유리 문진과 아버지의 시간이 깃든 옥빛 거북 문진이다. 앞으로 문진은 바람에 펄럭이는 책장이 흔들리지 않도록 눌러 주길 기대한다. 마음이 가라앉지 못하고 들뜰 때 내 마음을 진중(鎭重)으로 가볍게 누른다.

 

아버지를 회상하는 사이 햇볕이 든다. 밝은 빛에 마음이 산만해질까 봐 커튼을 친다. 그러고는 책상 앞에 앉아 책을 펼친다. 마음이 자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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