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딤돌 / 김석이 - 2025년 제5회 우하 박문하 문학상 최우수상

 

 

시간은 신비로운 조각가다. 무엇을 깎아내고 무엇을 남길지 다 알고 있는 듯하다. 폐가가 된 고향 집 앞에서니 대문 한 짝은 간곳없고 사랑방 문짝은 세월의 손톱에 할퀴어져 문살만 간신히 숨을 붙이고 있다.

 

담쟁이 넝쿨이 담장을 넘어 마당을 점령했다. 형제 넷이 뛰어놀았던 그토록 넓던 마당은 한 걸음으로 가로질러진다. 어머니의 꽃밭 자리엔 맨드라미, 봉숭아 대신 이름 모를 잡초들이 제 세상 인양 뿌리를 내렸다. 왼쪽 아래채에 내가 좋아했던 사랑방이 보인다. 추운 겨울에는 아이들이 모여 생고구마를 깎아 먹으며 놀았다. 저녁이면 어른들이 군불 땐 방에서 사부작사부작 새끼줄도 꼬았다. 새끼 꼬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곤 했다. 소죽 끓이고 군불도 때던 아궁이, 말린 벼와 오래 먹을 양식을 보관했던 창고도 세월을 이기지 못한 모양이다. 초가집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에 함석지붕으로 바뀌었다. 벽은 반쯤 허물어지고 붉게 녹슨 지붕만 버티고 있다.

 

청마루로 오르는 그 디딤돌만은 여전하다. 마루는 집에서 기르는 개나 염소가 올라가지 못하는 축담에서 무릎보다 조금 높다. 사람도 축담에서 바로 올라가기에는 조금 높아 마루로 오르내리는 곳에 큰 돌을 다듬어 디딤돌을 놓았다. 디딤돌을 밟고 오르면 쉽게 마루로 오르내릴 수 있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가족이 밟고 오르내렸는지 반들반들 윤이 나도록 닳아 있다. 투박하지만 묵직한 디딤돌에 올라 마루에 걸터앉았다.

 

기억은 물살처럼 흘러 돌아온다. 어린 손자가 높은 마루를 두려워할 때, 할아버지는 작은 손을 잡고 디딤돌을 밟게 했다. “천천히, 하나씩” 할아버지의 음성이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마루에서 디딤돌로, 디딤돌에서 마당으로, 마당에서 세상으로, 인생이란 결국 이런 것이었을 터이다. 한 걸음씩 디딤과 감사함을 반복하며 나아가는 것.

 

중학교에 입학하던 날, 아버지가 내게 건네준 작은 옥편玉篇 한 권을 기억한다. 기초 숫자부터 시작해서 요일, 월, 이십 사 절기, 십이 간지를 포함한 일상에서 사용되는 한자漢字를 수록한 책이다. 책 읽기보다 놀기를 좋아했고 한자에 대해서는 더욱 관심이 적었으나 사용하는 단어 중에 한자가 있으면 펼쳐 보고 뜻을 찾았다. 도시로 나와 식구들과 몇 번의 이사를 할 때도 아버지는 옥편을 꼭 챙겨 내 책꽂이에 두었다. 누렇게 변색이 되고 묵은 종이 냄새가 나는 그 옥편은 여전히 한자 단어 지침서로 내 책꽂이에 있다.

오십 년이 지나고 아버지도 떠난 지금에야 목수 연장 망태 속에 큰아들에게 줄 옥편을 넣고 대문을 들어서는 아버지를 생각한다. 그 속엔 한평생 나무와 쇠못으로 살아온 아버지의 간절함이 담겨 있다. 아들만큼은 연장이 아닌 지식으로 세상과 맞서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아버지가 내게 놓아준 첫 번째 디딤돌이었으리라.

 

어른이 된 손자는 도시에서 사람들과 섞여 살아간다. 화려한 불빛과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빌딩은 몸이 저절로 움츠리게 한다. 올라가야 할 곳은 힘들어 보이고 내려가야 할 곳은 위험해 보인다. 이루고자 하는 작은 것 하나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 도시는 적응하기 벅차고 살아가기 위해 통과하는 관문도 많다. 오르거나 내려가는 곳에는 언제나 디딤돌이 필요했다. 디딤돌 도움으로 오르고 때로는 디딤돌 역할을 하며 쉼 없이 움직이는 도시의 일원이 되었다.

 

주말이면 늙어가는 손자가 고향을 찾아간다. 도로에 잘려나간 자투리 밭에 고향 나들이 텃밭 삼아 작물을 가꾸고 있다. 텃밭이 고향 가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몇 가지 씨앗을 심고 땀 흘려 잡초도 뽑는다. 거름 뿌리고 고랑 지어 심어 놓은 씨앗은 싹을 내고 자라 계절 따라 열매를 준다. 실한 오이랑 고추를 따는 날은 뿌듯한 마음의 부자가 된다. 흙을 만지는 순간은 복잡한 도시 일상에 찌든 마음의 때가 조금은 씻겨진다. 가족의 추억이 있는 고향의 포근함도 와 닿는다.

 

고향 집은 이제 지적도가 없이 산에 포함되었다. 번지가 없는 그곳에서 여섯 가족이 세상으로 발걸음을 떼었고, 각자의 길에서 제 몫의 디딤돌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의 목수 기술이 가난한 집을 일으키는 디딤돌이 되었듯이, 살면서 만나는 도움과 격려가 또 다른 디딤돌이 되어 삶을 떠받든다.

 

작은 산골에 대를 이어 씨족들이 모여 살았다. 동물 우는 소리와 아이들 노는 소리로 온 동네가 소란했다. 지금은 집들은 없어지거나 대부분 비워지고 세 집만 사람이 산다. 여든 주변의 집안 친지가 노인이 되어 살고 있다. 계절에 맞추어 찾아오는 산새들만 예전 같이 재잘대며 손자를 반긴다. 정겨운 사람들이 부르는 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것만 같다.

 

생각해 보면 디딤돌의 숙명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누군가를 움직이게 하고, 자신은 낮은 곳에 머물면서 타인을 높은 곳으로 이끈다. 밟히면서도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그 무게를 견디는 것으로 제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 할아버지가 바랐던 것도 아마 이런 것이었을 게다. 손자가 작은 디딤돌이라도 되는 일, 누군가의 든든한 받침이 되어주는 삶 말이다.

 

가족의 발자국 흔적이 있는 디딤돌 위에 앉아 흐린 기억을 더듬으며 비로소 깨닫는다. 삶에서 소중한 것은 높이 오르는 것이 아니라 깊이 뿌리 내리며, 화려하게 빛나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그 무게를 견뎌내는 것이라는 진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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