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회 재외동포 문학상> 수필부분 가작 수상 

 

 

 

사람이 사는 세상 / 임()선주 (재미수필문학가협회 회원)

 

조이스, 우리 큰손자가 펌 좀 해달라는데?

콴이 열세 살짜리와 작은 손자를 데리고 미용실로 들어섰다. 아이는 내게 쿡처럼 머리를 하고 싶다고 수줍게 말했다.

?

쿡이 뭐야? 아이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카타르 월드컵 개막식에 나왔던 쿡, 정국이요. 하며 정국의 헤어스타일에다 손가락을 톡톡 두드려 보였다.

아하, 정국.

나도 월드컵축구 개막식에서 춤과 노래로 전 세계인을 놀라게 한 정국의 공연을 본 적이 있다. 이 공연을 보고서야 요즘의 청소년들이 왜 BTS, BTS 하는지 이해가 됐다.

나는 아이의 머리 모양을 살펴보고, 머릿결도 손가락 사이로 빗어 봤다. 부드러운 머릿결이었다.

휴대전화로 나는 유튜브에서 정국의 ‘Dreamers’ 음원을 찾아 틀었다. , 이 춤 한번 춰봐. 그래야 네게 어울리는 머리 스타일을 잡을 수 있지.

아이는 민망한 듯 제 할머니를 힐긋 돌아보았다.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여주자, 마지못해 몇 번인가 춤 동작을 엉성하게 해댔다.

그때 제 형의 춤이 못마땅했던 10살짜리 작은 아이가 톡 튀어나오더니, 고 호리호리한 몸으로 날렵하게 스텝을 밟으며 나비처럼 춤을 추었다. 콴은 손뼉 장단을 맞추고, , ~ 나도 콴의 행동에 맞춰 분위기를 띄웠다.

내 미용실이 있는 오렌지 카운티의 가든그로브는, 오래전부터 한인타운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언제부터인가 바로 옆 동네로 베트남 이민자가 늘어나더니 리틀 사이공이라는 베트남 타운이 형성되었다. 한인 커뮤니티와 이웃하게 된 그들은 한인들과도 매우 우호적으로 지냈다.

몇 해 전, 동남아 국가의 축구 대항전인 스즈키 컵에서 베트남이 우승하자, , 일 월드컵 때 흥분했던 우리 교민들만큼이나 떠들썩했다. 그날 새벽, 베트남 청소년들은 그들의 국기와 함께 태극기, 박항서 감독의 얼굴이 찍힌 기를 차에 꽂고 가든그로브 거리를 누볐다고 콴이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잠시 으쓱했다.

그즈음 베트남 커뮤니티의 청소년들이 우리 미용실을 많이 찾아왔다. 대부분 콴의 손자처럼 아이돌 스타인 정국이나 현빈의 헤어스타일로 머리를 하고 싶어 했다.

인스타그램 조이스 헤어스튜디오좋아요와 댓글이 늘어났다. 이러다 내 미용실이 베트남 애들 전용이 될까 봐 염려도 된다. 나는 15년 차 베테랑 미용사! 아이들 머리에 신경 쓴다는 게 좀 그렇다. 하기야 이 미용실을 처음 인수하고 막막했을 때를 생각한다면 배부른 소리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목을 길게 빼고 출입문에다 신경을 곤두세울 때였다.

조이스 헤어스튜디오를 시작했던 15년 전, 그때 나는 막 미용학교를 마치고 곧바로 이 미용실을 인수했다. 처음엔 미용실을 매입하기 전에 얼마 동안 헬퍼로 일하며 미용 기술을 더 익히려 했다. 전 주인은 내 제안을 거절하며, 매입을 먼저 하면 얼마 동안 돕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전주인이 근무하는 주말을 제외하고는 손님을 받는다는 것은 두려움을 넘어선 공포였다. 미용 가위가 낯설게 느껴지고 손에서 미끄러질 것만 같았다. 거울 속 손님에게 다가갈 때마다 심장이 조여들었다. 가위를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고 식은땀이 났다. 고객의 날카로운 시선이 비수처럼 날아들 것만 같았다. 차라리 가위를 놓고 도망치고 싶었다. 당연했겠지만 손님의 발길이 뜸했다. 좁은 지역에 금방 소문이 돌았을 것이었다. 밤이 되고 문 닫을 시간이 되면 나는 탁자에 엎드려 흐느끼기 일쑤였다. 어떻게 시작한 건데... 보잘것없는 사업이지만, 이 업체를 인수하기까지 겪었던 어려웠던 일들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누군가가 들릴 듯 말 듯하게 유리창 문을 두드렸다. 미용실 바로 옆에서 스킨케어를 운영하고 있는 베트남 여성이었다. 얼마 동안 미용실의 동태를 살펴봤을 여자는, 내가 탁자에 엎드려 있는 모습을 보고 문을 두드렸다. 탁자에 마주 앉은 여자는 한참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두려워하지 말아요. 처음 시작하는 일이란 어떤 업종이든 통과의례 같은 것이 있답니다. 한국 사람의 손끝은 특별한 감촉이 있다던데, 6개월 정도만 고생하면 극복할 거예요. 6개월 동안 오는 손님의 머리를 마음껏 다뤄보세요. 아예 다시 안 올 거라고 작정하고요. 그녀도 스킨케어로 직업을 바꾸기 전엔 미용사로도 일했다고 했다.

이상한 건 그렇게 마구 덤비니까 오히려 만족할만한 머리 모양이 되더라고요. 신기하지요? 그 말을 하던 여자는 살짝 웃기까지 했다. 그러니 겁낼 거 없어요. 그 손님 다시 안 오더라도 새로운 손님이 오기 마련이니까요. 내 사정을 들은 여자가 내게 말했다. 여자는 영어로 말했지만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바위틈에서 쪼록쪼록 흘러내리는 물소리 같았다. 내 등을 한번 쓰다듬어 주고 일어서던 여자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콴이라고 해요. 맞잡은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콴이 위축되어 있던 내게 손을 내민 것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내게 다가온 운명의 손길이었다. 그 일 이후 내가 지나온 발자취는 이미 정해진 나의 운명의 길이었음을 느낀다. 그때의 시련은 내가 감당해야 할 것을 전제로 한 담금질이었음을 깨달았다. 한때는 죽음까지 생각할 만큼 견디기 힘든 시련을 준 운명에 대해 나는 엄청난 원망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런 시련의 과정이 내게 없었다면, 오늘 내가 누리는 이 평화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면 지나간 모든 게 드라마틱한 삶의 아이러니란 느낌마저 들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서로 격의 없는 사이가 되어 15년을 친구가 되어 지낸다. 나는 콴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의 위로와 격려로 인해 힘든 시기를 쉽게 이겨낼 수 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다섯 살가량 많았지만, 겪어온 세상살이도 비슷했던 콴은 사람의 행복은 사람에게서 온다는 것을 내게 일깨워주었다.

이제는 미장원 일도 바쁘지만, 바로 옆에 콴의 업소가 있어 출근길이 즐겁다. 아침에 가게 문 여는 시간도 같았다. 조금 늦게 도착한 쪽이 그쪽으로 가서 나 왔어. 하고 인사를 건네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었다. 서로 밝게 웃다가 문득 지나간 날, 콴 만큼이나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사람의 기억이 툭 튀어나왔다.

알베르토.

20년도 지난 그때, 나는 남편과 함께 마켓 등지에 물품을 대어주는 홀 세일 서플라이 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우리와 몇 년을 함께한 그는 매사가 꼼꼼했고, 거래처에 물품을 배달하는 것도 여차 없이 잘 해냈다. 우리가 그를 신뢰했던 것은 정직함과 우직함이었다. 함께 일한 몇 년을 한 번도 결근하거나 늦게 출근한 적이 없었다. 업체를 우리에게 넘긴 전 주인도, 그를 오랫동안 보아온 거래처에서도 성실하고 건실한 그를 신뢰하고 있었다. 그를 보며 우리는 인복이 참 많다고 즐거워했다. 알베르토는 앞으로 5년만 더 일하고 모은 돈으로 고향에 내려가 목장을 가지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우리도 그의 꿈이 이루어지길 진심으로 응원했다.

업체를 운영한 지 3년째가 되던 해 캘리포니아에 담배 파동이 일어났다. 우리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주 정부에서 담뱃세를 몇 차례에 걸쳐 대폭 올린다는 발표였다. 지금의 가격보다 두 배 이상, 혹은 더 오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 발표 후 유통업계가 발칵 뒤집혔다. 담배가 없어서 못 판다는 일반 소매점도 생겨났다. 업체마다 담배를 비축하느라 혈안인 때였다. 우리도 비축해 놓은 돈과 주변에 변통해서까지 돈이란 돈은 다 끌어모아 물건을 사들였다. 떠도는 소문도 아니고 주 정부에서 공표한 것이라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 어느 날 창고에 보관 중인 담배와 배달용 트럭이 사라졌다. 창고 문이 활짝 열린 채 속이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담배 파동으로 일생일대의 기회라 여겼던 전 재산, 그리고 가족처럼 믿었던 알베르토까지 한순간에 증발해 버린 것이다. 발밑이 꺼지는 듯한 아찔함,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온몸을 휘감았다. 경찰의 단정적인 한마디는 내 마지막 희망마저 산산조각 냈다. ‘지금쯤 멕시코 국경을 넘었을 겁니다.’ 믿음은 한순간에 독으로 변했고, 세상의 모든 빛이 사라진 듯했다. 남편과 나는 미친 사람들처럼 뛰어다녔지만, 원상을 회복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남편은 물품을 구입할 자금을 구하러 뛰어다녔고 나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거래처를, 지도책을 봐가며 아침부터 밤늦도록 찾아다녔다.

그날은 아침부터 날이 흐렸다. 정신없이 거래처를 들락거리다 마지막 거래처에 닿은 것은 이미 문 닫을 시간이 지나서였다. 막 문을 닫으려는 업주의 눈치를 봐가며 가까스로 물건을 넘겨주고 나올 때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었다. 차를 주차해 놓은 곳은 50미터가 넘었다. 비를 맞으며 뛰었다. 속옷까지 흠뻑 젖은 몸으로 차에 올라타고 빗물을 닦고 시동을 걸었다.

띠리릭, 띠리릭.

차에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당황한 나는 연신 키를 돌려보았다. , . 눈앞이 캄캄했다. 지나가는 차도 별로 없는 한갓진 동내였다. 물품을 건넨 가게는 이미 셔터를 내린 후였다.

빗줄기는 앞 유리를 때려 시야를 가렸고, 차는 시동조차 걸리지 않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낯선 거리, 사방은 칠흑 같았다. 핸드폰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두려움과 추위 속에서, 내 입에서는 알베르토의 이름이 저주처럼 터져 나왔다. 그를 향한 원망은 비 오듯 쏟아지는 눈물과 함께 목구멍을 찢고 나왔다

무작정 차 안에만 있을 수는 없어 밖으로 뛰쳐나왔다. 불 켜진 업소도 없는 도로 주변은 캄캄했다. 앞뒤를 둘러보아도 어둠만 내려앉은 길을 무작정 걸었다. 공포가 음습해 왔고 비에 젖은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바람이 심하게 불었고 장대비는 바람이 부는 대로 날렸다. 우산은 바람 앞에 멋대로 휘어졌다. 어둑한 곳에서 사람이 제일 무서웠지만, 또 사람이 제일 그리웠다.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면 누구라도 붙잡고 통사정으로 도움을 청했을 것이다.

그때, 사거리 저 멀리서 한 줄기 노란 불빛이 새어 나왔다. 반가웠다. 뛰듯이 다가간 나는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절로 탄성이 터뎌 나왔다. 태극기다! 유리창 안으로 태극기가 보였다. 태권도 도장 안에 걸린 문짝만 한 태극기를 보는 순간, 엄마를 만난 듯 울컥,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도장 안에는 열대여섯 명의 꼬마들이 검은 띠를 두른 히스패닉계 청년으로부터 수련을 받고 있었다. 병아리 같은 아이들은 앙증맞은 기합 소리를 내고 있었다.

출입문 앞에 우산을 든 학부모들이 비에 젖어 생쥐 꼴로 들어선 꼬레아나를 보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당당했다. 태극기 앞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던 검은 띠가 내게 한달음에 달려왔다. 내가 한국인임을 단박에 알아본 그는 나를 그의 사범 대하듯 했다. 사범은 출타 중이고 그는 조교라고 했다. 더듬거리며 나의 사정을 설명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아이들의 교육을 누군가에게 맡기고 뒷문으로 나가 그의 차를 몰고 왔다. 낡고 작은 차였다. 금방 시동이 꺼질 듯 달달 앓는 소리를 냈다. 그가 내 차 옆에 차를 세우고 점프 케이블을 제 차에 연결하고 몇 번인가 차에 시동을 걸어보아도 시동은 걸리지 않았다. 배터리를 새것으로 갈아 끼워야 한다는 그의 말에 따라 나는 그의 차에 함께 타고 파트 샵에 갔다. 배터리값은 65불이었고 내게 43불밖에 가진 현금이 없었다. 그도 빈 몸으로 나왔던 참이었다. 하필이면 그날따라 거래처 모두 체크로 결재했었다. 그는 또 망설이지 않고 나를 파트 샵에 세워둔 채 도장으로 갔다가 왔다. 그의 몸도 온통 비에 젖어 머리에서 굵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꺼낸 꼬깃꼬깃한 젖은 돈도 전부 일 불짜리로 긁어모은 돈인 것 같았다.

카를로스.

엘살바도로에서 온 스물세 살의 그는 잡(job)을 잡을 동안 한국인 사범을 도우며 도장에서 생활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빗길을 뚫고 집으로 오면서 나는 내내 그를 생각했다. 비 내리는 낯선 거리에서 카를로스라는 이름의 낯선 청년은 내게는 구세주였다. 낡은 차로 밤늦도록 나를 돕고, 가진 돈까지 털어 배터리를 사주던 그의 순수한 눈빛. 그러나 그 눈빛 너머에는, 내 모든 것을 앗아간 알베르토의 싸늘한 배신이 그림자처럼 떠돌았다. 선과 악이 서로 공존하는 이 모순된 세상에서,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선과 악은 칼로 자르듯 나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한 덩어리로 붙어 공존하는 것임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알베르토의 배신이 뿌린 상처를 카를로스의 선행이 덮어주었지만, 그 상처는 역설적으로 인간 본성의 복잡다단한 이중성을 내게 가르치고 있었다.

알베르토는 지금쯤 제 고향에서 농장을 사고 돼지를 사고 소를 샀을까?

그를 생각하며 나는 또 인간의 이중성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인간은 누구나 양면의 동전처럼 선과 악이 내재 되어있다는 사실에 관해.

내가 보아왔던 알베르토는 선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한순간에 악인으로 변한 원인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알베르토의 눈을 어지럽힌 건 정작 우리였을 수도 있었다. 저것만 손에 쥐면 꿈에 그리던 농장을 가질 수 있다는 빌미를 준 것은. 우리는 좀 더 지혜로웠어야 했다.

알베르토를 생각하며 시달리는 나를 카를로스가 대신 위로해 준 것도 같다. 세상도 음과 양이 공존하면서 조화를 이루지 않던가. 슬픔의 대치어인 기쁨도 동반적 관계로 공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정말이지 냉정했어야 했다. 카를로스와 알베르토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그 대비 점을 내게 보여줌으로 세상 돌아가는 이치의 일면을 보여주었다. 카를로스를 알고부터 나는 알베르토를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너무 힘들고 어려운 때라 카를로스에게 제대로 인사를 치르지 못한 게 두고두고 아쉬웠다. 시간이 좀 지나 찾아갔을 때 그는 그곳에 없었다. 그가 어디에 있던 그의 선한 행적을 나는 오래 기억할 것이었다. 알베르토와 함께.

 

뜻밖에 알베르토를 만난 것은 일을 마치고 한국 마켓에 들렸을 때였다. 20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를 본 순간 온몸이 굳어져 버렸다. 턱이 떨리고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잊었다고 생각했었고, 세월이 지워낸 줄 알았다. 그러나 마켓 생선 부에서 고등어인지 꽁치인지를 토막 내고 있던 그를 본 순간, 내 안의 모든 시간이 멈추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귀까지 울리고, 숨이 턱 막혔다. ‘알베르토그 이름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마스크 너머 그의 눈빛을 확인하는 순간, 내 머릿속은 하얗게 비워졌다. 내 차로 서둘러 돌아온 나는 시트에 몸을 기댔다. 독기 품은 증오가 다시 내 안에서 끓어올랐다. 나는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이미 용서했다고 수없이 되뇌었지만, 그건 진정한 용서가 아닌 무기력한 체념이었던 것이었다.

겨우 마음이 진정된 나는 마켓 안으로 들어가 그에게 알은 채를 했다. 놀랄 줄 알았던 그는 뜻밖에도 덤덤했다. 그는 내게 다가오며 조이스! 하고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순간 옛일이 떠올라 따귀라도 올려치고 싶었다. 나쁜 자식! 지난날 나는 알베르토, 그가 키우는 소뿔에 받혀서 한 십 년을 뒹굴고 앓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 사고가 있고 얼마 동안 업체를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우리 부부는 모진 고생을 했다. 끝내 힘에 부친 우리는 그 업체를 살려내지 못했다. 빚더미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파산했고 끝내는 파경을 맞았다. 나는 나이 어린 딸을 데리고 백척간두에 서서 떨었다.

그가 마켓 일이 끝나길 기다려 밖에서 기다렸다가 만난 그는, 고개를 숙이고 두 분에게 너무 미안했다며 눈가를 닦았다. 그것만 있으면 고향에서 농장을 사고 소를 키울 수 있다는 친구의 꼬임에 빠졌다고 변명 같은 말을 했다. 물건은 밖으로 빼내 온 순간 친구가 저를 두고 차를 몰고 튀었다고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말도 했다. 홈리스가 되어 방황하던 그는 예전에 우리의 거래처 사장을 만나 그분의 도움으로 이곳에서 일한다고 했다.

추레하게 늙어가는 그를 보면서 20년 전의 끔찍한 악몽이, 이제는 그저 흘러간 강물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상대적으로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누리고 있음 때문일 런지 나는 그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20대의 파릇했던 청년이 부스스한 흰 수염을 달고 콧물 눈물이 범벅이 되어 울고 있다. 그 모습을 보는 나도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아침에 사무실로 출근하면 알베르토가 먼저 와 있었다. 그때 나는 우직하고 정직하고 충직한 알베르토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부터 상쾌했다. 그는 한때 내게 그런 젊은이였다.

카를로스와 콴, 그들은 내게 삶의 어둠 속을 밝혀주는 한 줄기 빛이었다. 그리고 알베르토. 그는 내게 가장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역설적으로 그 상처는 인간 본성의 다면성과 세상의 아이러니를 깨닫게 하는 거울이 되었다. 나는 이제 알 것 같다. 사람이 사는 세상의 희비는 모두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온다는 것을. 그들이 엮어내는 실타래가 바로 나의 운명이자, 이 삶을 채우는 아름다운 태피스트리라는 것을.

나는 죄인처럼 앉아 흐느끼는 알베르트를 돌아보았다.

울지마라 알베르토야. 다 지나간 일이야.

나는 그의 거친 손을 잡고 손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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