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花 / 김선자 - 제22회 서하西河 전국백일장 장원
풀 내음 물씬 풍기는 들길을 지나 밭머리에 선다. 저 모퉁이만 돌면 그녀의 뜰이건만. 한달음에 달려가 엄마 품에 꼭 안겨 목 놓아 부르고 싶었다. 엄~~마. 한동안 입 밖으로 부를 수 없던 그 이름, 오늘도 가슴에서 먼저 걸린다.
그녀가 떠난 두 번째 봄, 연분홍 꽃잎이 산자락에 수를 놓는다. 산산한 바람에 진달래가 한들거리자, 들풀 사이에 숨어 있던 제비꽃이 조심스레 보라색 얼굴을 내민다. 한 송이 한 송이 진달래를 꺾는 동안, 엄마~ 지난겨울엔 눈이 참 많이도 내렸지. 춥진 않으셨어. 미리 연습이라도 하듯 가만가만 불러낸다.
그녀의 뜰로 들어선다. 진달래 꽃다발을 앞세우면 내 감정이 맑아져 ‘작은딸 왔어. 잘 계셨어. 바쁜데 뭐 하러 왔냐고? 보고 싶어 왔지.’ 금세 수다쟁이가 될 줄 알았는데 반가움의 인사는커녕 입도 뻥긋 못 한 채 뒤돌아 앉는다.
올해도 어김없이 쑥 한 바닥쯤 상석 앞을 지키고 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지 못한 게 염치없어서 잡초라도 뽑는데, 밭두렁에 잎을 붙인 냉이가 작은 꽃대에 하얗게 생명을 피운다. 햇살이 등을 다독이는지 콩알 같은 꽃들이 고개를 든다. 나 대신 우리 엄마 말동무해 줘서 고맙구나. 들꽃을 핑계 삼아 때를 놓쳐버린, 가슴 한편에 머무는 아직 못다 한 말이 손끝으로 흘러간다.
엄마 계신 그곳도 꽃이 폈어요? 여기 보세요. 이건 냉이, 광대나물도 있어요. 기억나세요? 저쯤일까요. 보리밭 매다가 줄기 하나에 보라색 꽃이 층층이 올라오는 풀이름 뭐냐고 물었을 때. 광대나물을 내 눈에 가득 심어주던 어린 날. 엄마도 저 보리 순처럼 푸릇푸릇한 시절이 있었겠지요?
엄마의 유년은 봄꽃보다 먼저 피었다. 어린것들은 대개 나릿나릿 자라며 계절을 익히지만, 엄마는 예외였다. 국민학교 3학년, 그해 겨울은 유독 길고 추웠다고 했다. 일본 순사들이 아버지를 데려간 뒤, 남은 것은 재봉틀과 가방을 만들던 가죽 자투리뿐. 그 조각들은 유품이 되어 봉분이 만들어졌다. 그로 인해 어미 품을 잃고 할아버지 집에서 살게 되었다. 언니와 동생들 손이 아닌 사촌 동생들의 손을 잡았고. 엄매, 아부지 대신 작은엄매, 작은아부지를 부르며 집안일을 배우고 어른들 눈치를 익혔다.
그 시절의 엄마는 봄의 중심이 아니라, 가장자리에 조용히 피어난 풀꽃이었다. 스물한 살에 아버지를 만나 꽃가마에 올랐다. 짧은 신혼의 끝은 아버지의 군복무로, 단숨에 며느리에서 가장이 되었다. 시부모님과 시누이, 모두의 하루에 끌려가는 사람으로 살아갔다. 천수답 한 마지기 없는 살림이라 남의 논과 밭에서 하루하루를 펼쳐냈다.
엄마의 스물둘, 스물셋…. 젊디젊은 시간은 고운 치맛자락 대신 진흙과 땀에 찌든 수건으로 흘러갔다. 마을 어귀 논두렁엔 개망초와 망초꽃이 피었지만, 꽃을 바라볼 여유는 없었다. 밥 짓는 연기에 가려졌고, 논머리 물꼬에서 쭈그린 채 아직 피지 못한 웃음으로만 머물러 있었다. 그렇게 자신의 꽃다운 시절을 고스란히 흙에 묻고 다섯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이름도 예쁜 이신혜, 나의 엄마. 우리가 태어나서 ‘엄마’라는 이름 하나로 살림도, 고단함도, 세상도 다 감당했지. 손 하나, 발 하나 씻기며 커가던 우리들이 하나둘 글자를 배우기 시작하자 누구보다 더 바빴지. 가난이 무릎을 잡아당기고 있어도 엄마는 늘 한 뼘 더, 한 걸음 더 배움이라는 사다리를 놓아주려 애썼지요.
엄마의 인생은 자신의 것을 위해 써본 적이 없었다. 순간순간 자식과 누군가를 위해 먼저 주고, 먼저 웃고, 먼저 참아내는 삶. 그렇게 하루하루를 반죽처럼 이겨내며 한 사람의 삶을 다섯 사람 몫으로 빚어냈다. 팔십 여생을.
엄마 곁에 앉아 있자니, 손끝에 흙이 묻는다. 무심히 뽑은 풀 한 줌 속에는 작은 보라꽃이 스며든다. 이름 모를 들꽃 하나에서도 나는 자꾸만 엄마의 얼굴을 본다.
당신이 걸어온 삶을 따라오다 보니 나도 어느덧 당신이 되어가고 있어요. 두 아이 뒤치다꺼리에 구겨진 주름을 다리며, 밥 먹었냐. 별일 없지. 안부를 물으며, 물김치에 손을 담그고, 텅 빈 식탁에 앉아 TV 소리를 듣는 밤이면 문득문득 당신의 뒷모습이 내 안에서 살아나요.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왜 그 많은 고단한 날들을 불평 한마디 없이 견디셨는지. 늘 손은 바쁘고, 말이 없었는지를.
엄마, 당신이 다녀간 자리마다 꽃이 폈어요. 냉이, 광대나물, 진달래, 민들레, 봄까치꽃. 누가 심지 않았는데도 봄마다 그 자리에 어김없이 피어나는 꽃들. 그건 아마, 당신이 남기고 간 말 없는 편지이겠죠.
저도 그 꽃 앞에 편지 한 송이를 놓습니다. 우표도 주소도 소리 없는 문장이지만, 당신이기에 눈 감고도 읽을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의 딸이어서 행복했고, 당신의 품이어서 따뜻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