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좁은 초원 한가운데 서 있는―이기리(1994∼)
단 한 그루의 보호수
단 한 사람의 손길
단 한 마리의 추격
단 한 가지의 진실
단 한 마디의 거리
단 한 계절의 온기
단 한 시절의 패배
단 한 소절의 의미
단 한 자리의 물길
단 한 가닥의 변명
단 한 번의 장난
단 한 권의 자살
단 한 짝의 마음
남아도는 실마리가 없어서
우리는 뜻 모를 병명으로 떠돌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시간을 가지자”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이때의 시간은 거리다. 당신과 나 사이, 우리 ‘사이’의 지면을 널찍이 펼쳐 이별을 유예하자는 말이다. 얼굴이 보이지 않게, 몸이 보이지 않게, 마음이 보이지 않게 서로에게서 멀어져 보자는 말이다. 이별은 잠시 미뤄졌을 뿐 오고 있다. “비좁은 초원 한가운데”로, 언제라도 무성해질 수 있는 이별 한 톨이 심어져 있는 이곳으로 오고 있는 중이다. 이기리 시인은 시간을 가지자는 말이 ‘변성기’처럼 온다고 한다. 원래의 목소리와 앞으로 지니게 될 목소리 사이, 울퉁불퉁한 시간처럼 불안정하게 나올 목소리! 이별을 앞둔 연인들은 이 목소리를 통과해야 한다.
이별이 도사리고 있는 그 초원은 “비좁”기 때문에 단 하나의 무엇만을 지니고 있다. 천천히 소리 내어 읽어 보면 사랑과 이별 사이, 연인들이 나눠 가질 수 있는 좋은 것과 나쁜 것들이 고루 보인다. 보호수, 손길, 추격, 진실, 거리, 온기, 패배…. 이것을 세는 단위가 기이해서 아름답다. 단 한 권의 자살이라니! 사랑으로 얻은 “뜻 모를 병명”들이 서늘하다.
박연준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