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의 저편 오늘
얼마 전 기억력이 현저하게 떨어져 병원에 가서 치매 검사를 받았다. 모두 다 정상이란다. 그저 노화현상의 하나일 뿐이란다.
많은 것이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들이 아쉽다. 그 기억들은 상처도 있을 거고 추억도 있을 것이다. 아픔이건 그리움이건 내 삶의 여정이었던 것들이다. 잊을 건 잊어야 하는 게 인생이라지만 요즘은 기억들이 무자비하게 사라지니 무섭다. 내 무의식 저편으로 꼭꼭 숨어버리는 기억들이 안타깝다.
우리 몸 세포는 오 년마다 전부 새롭게 바뀐단다. 생리학적으로 오 년 전 나의 몸과 현재 나의 몸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나를 나 이게 하는 것은 기억 때문이란다. 이 기억이 일관된 나를 유지해 주는 열쇠라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뇌과학 공부는 흥미롭고 유용하다.
기억이 있어야 감정도 생겨나고 맛도 기억이 있어야 생긴다는 것이다.
또, 뇌과학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자의성(恣意性)이란 것도 사람마다 기억이 달라서 생기는 것이란다. 단어건 문장이건 해석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게 각기 다른 것은 기억이 달라서 생기는 당위라는 것이다. 사람마다 갖고 있는 주관성이 기억이 달라서 생기는 것이라니 그저 놀랍다.
며칠 전 무려 17년을 함께한 반려견 부(boo)가 노환으로 우리 곁을 떠나갔다. 하얀 털의 몹시 귀여운 푸들이었다. 지금까지 세 마리의 반려견과 작별하였는데, 내 머릿속의 강아지 하면 떠오르는 반려견은, 한국 시골집에서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함께 한 누렁이 칸(khan)이다. 천승세의 소설 “황구의 비명”에 나올듯한 전형적인 누렁이다. 그 후로 메리라는 셰퍼드 종 반려견이 있었으나 나에겐 개,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누렁이 칸이다.
자의성(恣意性)이란 말은 법률 용어이기도 하지만 매우 중요한 언어학 용어다. 소리와 의미의 관계가 필연적이지 않은 특성을 설명하는 단어다. 다시 말하면 언어를 구성하는 '형태(form)'와 '내용(content)'이 본질적으로는 관련이 없으며 자의적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자의성, 소쉬르, 구조주의, 기표(시니피앙signifiant.형태)와 기의(시니피에signifié.내용). 랑그와 빠롤, 이 말을 국문과 사 년 내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다.
‘강아지’란 단어를 보면 우리는 똑같은 강아지를 떠올리는 게 아니다. 난 강아지 하면 항상 우리 집 개를 생각할 테고, 다른 사람 역시 강아지 하면 자기 집에서 키우는 개를 떠올릴 것이다. 내가 떠올리는 강아지와 다른 사람이 떠올리는 강아지가 다르다. 이처럼 모든 단어는 절대로 현실에 존재하는 특정 지시 대상을 가리킬 수 없다. 단어와 지시 대상과 일 대 일의 적확한 대응이 되지 못하고 의미가 수없이 확산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강아지라는 단어를 보고 떠올리는 것은, 실존하는 지시 대상이 아닌 개념(이미지)일 뿐이다.
‘강아지’라는 단어는 실재 ‘강아지’를 반영한다는 플라톤의 그릇된 언어관이 언어를 절대화시켰다고 한다. 문자의 권위는 여기에 기반한다. 그러나 소쉬르는, ‘강아지’라는 단어는 실재를 반영하는 게 아니라 이미지(개념)만 나타내는, 자음과 모음이 결합한 부호(기호)일 뿐이라는 진실을 찾아낸다. 이 천년 넘게 이어져 오던 문자의 절대적 권위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언어는 완전한 것으로 실재를 반영한다는 플라톤의 잘못된 언어관을, 언어는 불완전한 것으로 실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는, 백여 년 전 소쉬르(스위스. 언어학자)의 언어학적 성취는, 철학적으로도 구조주의가 탄생하는 데 이바지한다.
과학은 이론값과 실험값이 일치한다. 그래서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다. 자의적 해석이 끼어들 틈이 없다. 반면 불경이든 코란이든 성경이든 저마다 해석하는 게 다르다. 왜냐면 언어라는 자체가, 관념(이미지)이라서 자의성이 개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교리는 하나인데 각각 받아들이는 게 차이가 난다. 여기에서 소승 불교. 대승 불교. 수니파. 시아파. 감리교. 장로교 등등 교파가 갈리게 되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이것은 언어가 지닌 불완전성 때문에 자연적으로 생기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유사 종교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절대 진리를 문자로 담으려 했던 오류는, 언어학적 무지에서 온 것이리라.
이 글의 취지는 언어의 기능적 한계, 그 불완전성을 안식하자는 데 있지, 언어 자체를 폄하 하자는 데 있지 않다. 인간은 언어란 도구로 추상적 관념체계를 세울 수 있어서 비약적으로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절대적 진리가 상대적 진리로 바뀐 배경도 소쉬르의 언어학적 성과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사회학자들은 세계가 우경화된다고 걱정이다. 전 세계적 현상인 극심한 빈부 격차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권력을 잡은 자들이 파시즘을 도모하고 있다. 이 극우들은 근본적으로 독재, 절대 권력을 추구한다.
사상적으로 말하면 절대적 진리가 있다고 믿는 자들이다. 인간은 모두 다르다는 것, ‘차이’를 부정하는 자들이다. 힘으로 하나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인류는 수도 없이 경험했지만, 결과는 비극적이었다. 제각기 기억이 다름으로, 인간을 한 무리로 만들어 통치(독재)할 수 없다는 뇌과학의 발견을 정치가들이 학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