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알의 주판 / 김귀선
붐한 새벽이었다.
"흐흠, 흐흠. 일나셨능교"
삽짝 쪽에서 나는 인기척에 옆방 문이 펄럭 열렸다.
"어이 성도이가"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옆에 자던 언니가 얼른 머리맡을 더듬어 옷을 챙겨 입고는 정지로 나갔다. 두런두런 어른들의 대화가 옆방에서 들렸다. 언니가 술상을 들여놓느라 잠시 옆방 문이 열렸다가 곧 닫혔다. 얼마 후 다시 방문이 열리며 아버지의 인사가 들렸고, 댓돌 위에서 반쯤 신은 고무신을 땅바닥에 끌어가며 마저 신은 아재는 삽짝을 지나 골목으로 사라졌다.
나는 이불속에서 귀로 그 풍경을 보고 있었다. 어둠사리에 찾아온 아재들의 발길은 으레 돈과 연관 있었다. 가끔은 아버지의 친구인 상촌 어른이 해장하러 들르곤 했지만, 그 외의 아재들은 대부분 같은 볼일이었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만으로도 돈을 갚으러 온 것인지, 빌리러 온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날 성동아재는 돈을 갚으러 온 모양이었다. 앉은뱅이책상 서랍 여는 소리가 낮게 들렸다. 잠시 조용했다. 아버지는 서랍에서 장부를 꺼내 아재의 이름을 찾아 주판으로 이자를 계산해 돈을 받은 뒤, 주판을 성동 아재의 이름 위에 대고 선을 쭉 그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술 한 잔을 주고받으며 세상 얘기를 나누었으리라.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나는 추억 어린 그 주판을 가져왔다. 나무로 된 거무스름한 주판, 길이는 어른 한 뼘 반 정도다. 윗줄에 알이 하나, 아랫줄에 네 개가 있는 1/4식은 일본식, 2/5식은 중국식이라 한다. 아버지의 주판은 꿰인 알이 모두 열일곱 줄에 1/5식으로, 잠시 민간에서만 쓰였던 것이라 한다. 아버지의 먹감나무 앉은뱅이책상 서랍 속에서 장부와 함께 오랜 세월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주판이다.
산골 동네에 살던 부모님이 이웃에게 돈을 융통해 줄 수 있었던 것은 한지를 만든 덕분이었다. 개옻나무 잎이 붉게 물드는 늦가을이면 아버지는 밭둑마다 매초롬하게 서 있던 닥나무를 잘랐다. 쓸 만한 닥나무로 키우려면 풀과 넝쿨을 여러 번 걷어내야 했다. 무더운 날, 아버지가 비탈진 닥밭에서 풀을 멜 때면 땀에 젖은 삼베 적삼이 달라붙지 않도록 풀을 꺾어 옷 속에 넣으시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의 등은 곱사등처럼 불룩했다.
잘라낸 닥나무를 삶아 속대와 껍질을 분리한 후, 껍질을 말려 보관했다가 차례로 다시 물에 불려 검은 피를 벗기는 등, 한 장의 백지로 태어나기까지는 수십 번의 공정을 거쳐야 했다. 동지섣달 새벽 첫닭이 울 무렵이면, 아버지는 동네 앞 웅덩이에 담가둔 껍질을 지게에 지고 왔고, 어머니와 엇박자를 이루며 닥칼로 검은 피를 긁었다. ‘우두루룩, 우두루룩’ 고드름을 훑는 소리가 방바닥으로 울려왔다.
껍질을 벗겨낸 닥 속질을 마당에 널어놓은 날이면, 산에서 내려다본 우리 집 마당은 온통 광목천을 펼쳐놓은 듯했다. 그 뒤로도 양잿물에 삶고, 방망이로 두드려 곤죽을 내고, 물이 담긴 사각 나무통에 곤죽의 닥속질을 풀어 발에 한지를 뜨기까지 이어지는 과정은 끝없는 노동이었다.
겨울 내내 아버지는 지통(한지 작업하는 곳)에서 한지를 뜨셨다. 찬물에 잠긴 손은 언제나 불그레했다. 지통 골짜기에 버들강아지가 은빛으로 돋고 산수유꽃이 노랗게 터질 무렵이면 온 식구가 나서서 그동안 만든 한지를 말렸다. 큰 돌로 눌러 물기를 짠 눅눅한 한지를 뜨거운 강판에 붙여 말리는 일이었다. 종일 불을 넣는 일이 하도 지루해 잠깐 달래를 캐러 나갔다가 오지게 야단을 맞곤 했다.
주판을 흔들어본다. 작은 알들이 ‘착차르’ 소리를 낸다.
밭둑마다 병풍처럼 서 있던 짙푸른 닥나무들, ‘탁탁’ 골짜기를 울리던 엇박자의 닥방망이질 소리, 양잿물에 삶은 속질을 맨손으로 만질 수밖에 없어 마디마다 갈라진 언니의 손가락, 한지가 방 안 가득 쌓여 있던 풍경, 두 팔을 벌리고 쌓인 한지 위에 퍽 엎드렸을 때 느껴지던 무한한 편안함과 코끝으로 스며들던 한지 특유의 냄새…
모내기가 끝난 뒤, 큰 둥치의 한지와 함께 당수나무 아래서 버스를 기다리던 엄마, 행상을 떠난 엄마로 해마다 텅 비었던 여름, 어깨를 기울이며 무거운 술 주전자를 들고 지통으로 향할 때의 오솔길까지, 모든 것이 주판알에서 깨어난다.
주판은 이제 나의 어린 시절을 알알이 품은 102개의 타임캡슐로 내 책상 서랍을 지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