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진이 온다 

 

  서른여덟을 한 달 앞두고 나는 엄마가 되었다. 노산인 데다 전치태반이라 주치의도 만약을 위해 혈액센터가 있는 종합병원에서 출산하기를 권했다. 그래서 임신 기간에는 검사도 많았는데 출산한 지 십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이 다운증후군 검사이다. 초음파를 찍은 후, 태아의 목덜미를 통해 알 수 있는 간단한 검사라고 했다. 그 검사를 예약하고 며칠간은 ‘만약’이라는 단어를 붙인 문장들의 온갖 상상에 시달렸다.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한 질문들이었다. 내가 과연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울만한 멘털을 가졌는가 하는 개인적인 것부터 앞으로 펼쳐질 우리 부부의 삶이 행복할 것인지 하는 운명공동체의 것까지. 그렇게 상상 속에서 그려보는 나의 미래는 두려움 투성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검사 결과가 좋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 전부였던 며칠을 여전히 나는 기억한다. 그 검사를 기다리며 나는 동진이를 떠올렸다. 나와 열다섯 살 차이가 나는 사촌 동생이다. 

  우리 아버지는 장남이라 집안에 행사가 있으면 모든 친척이 우리 집에 모였다. 당연히 나와는 사촌이 되는 고만고만한 아이들도 함께 왔다. 자주 만나서였는지 아니면 성향이 비슷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사촌들과의 관계는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작은아버지의 아들인 동진이는 예외였다. 가족 모임이 결정되면 나와 동생이 제일 궁금한 것은 동진이의 참석 여부였다. 그것이 수년간 반복되다 보니 엄마도 모임 날짜가 정해지면 우리 남매에게 제일 먼저 하는 말씀이 “동진이 온다”였다. 그것은 일종의 암호이자 신호였다. 그리고 마침내 동진이가 오는 날이 되면 우리 남매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신속히 움직였다. 중요한 것들을 치우고 숨기느라 타임랩스 같은 동작이 끝나면 동진이가 왔다.   

  동진이가 두세 살쯤이었다.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동진이가 여느 아이들과 다른 것 같으니 발달 검사를 해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이다.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없고, 혼자서 하나의 장난감만 가지고 노는 것이 보통의 유아들과 다르다면서.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그것이 문제로 느껴지지 않았다. 내 눈에 동진이는 그저 기저귀를 떼지 못한 아기였으니까. 하지만 그 아기가 걷고, 달리는 시기가 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명절이 되면 동진이가 오는가, 안 오는가가 가장 중요했다. 

  속마음은 그랬다. 동진이는 안 오면 좋겠다. 안 오면 안 되나? 그리고 그 속마음은 점점 자랐다. 친구 만나러 나갈까? 차라리 내 눈으로 안 보는 게 낫겠어. 그리고 그 마음은 더 이상 속에 머물지 않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엄마, 나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와도 돼?” 

  환영받지 못한 아이였다. 적어도 나는 녀석을 한 번도 환영한 적이 없다. 우리 집 현관을 들어서면 동진이는 거실의 서랍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안에 있는 것을 모조리 꺼내 그것들을 만지고 확인하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녀석이 궁금해하는 서랍은 우리 집의 모든 방에 있었다. 그리고 각 방의 주인들은 녀석을 따라다니며 그건 너랑은 상관없는 것이니 꺼내지 말라는 말을 반복해야 했다. 더 이상 서랍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찾지 못하면 다음 목표물은 침대였다. 당시 내가 쓰던 침대 헤드는 책장 모양이라 아이들이 계단처럼 오르기가 쉬웠다. 동진이는 그 침대를 좋아했다. 올라가서 뛰어내리고 또, 올라가서 뛰어내리고를 지치지 않고 반복했다. 그렇게 서랍을 열고 닫고, 침대를 오르고 뛰고를 수백 번 반복하면 동진이가 집에 갈 시간이 된다. 녀석은 갔지만 엉망이 된 집과 하루 종일 받은 스트레스는 여전히 남아 애먼 엄마에게 동진이는 안 오면 안 되냐며 화풀이했다. 

  반갑지 않은 만남은 해가 바뀌어도 반복되었다. 하지만 그런 시간 속에서 성인이 된 나는 내가 있든 없든 내 물건들은 꺼내지고 망가질 것을 알기에 차라리 안 보는 것을 택하게 되면서, 녀석이 집으로 돌아갔는지 확인하고 귀가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렇게 나는 수년간 녀석을 보지 않게 된다. 어른들을 통해 간간이 소식을 들을 뿐이었다. 일반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녀석이 만들어내는 무수한 에피소드를 전해 들으며 같은 반 아이들의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겠다고 생각했다. 동진이를 특수학교에 보내지 않는 작은어머니, 작은아버지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게 동진이를 향한 내 팔은 결코 안으로 굽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아이를 임신했을 때, 다운증후군 검사를 기다리면서 자폐증이 있는 동진이를 수년 만에 떠올린 것이다. 현재까지의 기술로 다운증후군은 임신 중에도 확인이 된다. 하지만 자폐는 아이가 태어나서 어느 정도 자라야 확인이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 아이가 다운증후군은 아니라고 해도 다른 문제가 있을 수도 있으니 출산 후에도 나는 온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어쨌든 나는 자폐증 가족력이 있는 엄마니까.

  우리 딸이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신한 후로 나는 더 이상 동진이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잊고 살다가 최근에 읽은 엘리자베스 문의 ≪어둠의 속도≫는 오랜만에 동진이를 생각나게 했다. ‘자폐’라는 단어의 강한 이미지에 갇혀, 그것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어려운 장애라고 생각했던 내 고정관념을 뒤엎는 소설이었다. 더 나아가, 어쩌면 나도 자폐스펙트럼의 어느 선상에 놓여있는 것은 아닐지 되짚어 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특정 소음에 예민하고, 정리한 물건이 제 자리에 있지 않으면 화가 나는, 그런 나는 정상이고, 너는 비정상이라고 단정했던 시간 속에 있던 동진이에게 미안했다. 하지만 녀석은 지금도 그 시간 속에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생각 끝에 나는 작은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디를 가든 환영받지 못하는 아이를 키운다는 것, 그 삶을 생각하면서. 

  먼 친척 한 명 없는 미국에서 나는 십여 년간 혼자 아이를 키웠다. 흔히 말하는 독박 육아였다. 연구직인 남편은 집에 있어도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로 늘 생각에 잠겨 있고, 비행기를 타야 하는 장거리 출장도 여전히 많다. 살림과 육아가 내 적성에 맞지 않음을 진작에 깨달았지만, 되돌릴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혼자 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가 순해서였다.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아이들을 볼 때면 우리 딸에게 참 고마울 만큼. 

  오래전에 읽은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이 생각난다. 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개인적인 체험≫은 이제 막 태어난 아들의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방황하는 남성의 심리를 다루고 있다. 뇌헤르니아로 태어난 그의 아기는 수술해도 식물인간이 될 확률이 높다는 의사의 소견에 그는 소설 전반에 걸쳐 부성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 비난받고 힐난 받아 마땅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엄마가 된 지금의 나는 입장을 바꾸어 본다. 만약 나에게 장애가 있는 아이가 있다면? 십여 년 전, 다운증후군 검사를 앞두고 느꼈던 두려움이 스멀스멀 되살아난다. 

  오늘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작은어머니의 안부를 물어보려고 한다. 더불어 동진이는 어떻게 지내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