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하지 못한 말 / 청랑

큰오빠는 꽤 오랫동안 아팠다. 엄마는 아들의 병을 낫게 하려고 종합검진도 받고 한방과 민간요법 치료는 물론 여러 날을 엎드려 기도하셨다. 어미로서 온 힘을 쏟아부었지만, 차도가 없자 아버지 묫자리를 잘못 쓴 탓이라 생각했다. 결국 파묘 날을 잡았다.

아버지 산소를 찾았을 때 무덤 한쪽이 허물어져 있었다. 인부들이 곡괭이로 묘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곡괭이가 내리꽂힐 때마다 내 몸이 움찔움찔해졌다. 처음으로 대하는 아버지의 주검. 엄마는 어린 내가 놀란다며 아버지의 주검을 못 보게 했다. 무덤 옆으로 작은 계곡이 있어 물이 수없이 들락거렸던 듯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형체는 사라지고 앙상하게 뼈만 남은 아버지. 하얀 아카시 뿌리들이 주검을 옭아매고 있었다. 내 눈에는 뿌리들이 마치 쇠사슬처럼 보였다. 비록 생명은 없을지언정 내 아버지였다. 차마 바라보지 못하던 엄마가 말했다.

 

“이래서 아버지가 꿈속에 자주 나타나셨나 보다. 나 좀 꺼내 달라고.”

 

아버지가 땅 위로 올려졌다. 엄마는 그냥 깨끗이 화장하자고 했다. 산 자를 살리기 위해 죽은 자에게 내려진 선택이었다. 나는 그때만큼 큰오빠가 미운 적이 없었다.

간단한 예식을 치르고 뼈 위로 석유가 뿌려졌다. 불꽃이 춤을 추며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아버지 영혼이 훨훨 날아올라 별이 되기를 기도했다. 맑은 시냇물에 남김없이 뼛가루가 뿌려졌다. 그렇게 아버지는 7년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오빠의 병세는 그 후로 몇 년이 지나도록 나아지지 않았다.

시골에서 농사짓던 우리 집이 갑자기 서울 변두리로 이사했다. 부모님에게 자식 교육은 신앙이었기에 야반도주하듯 이뤄진 결정이었다. 생명줄 같은 농토를 그대로 두고 겨우 방 한 칸 전셋집에 살림을 풀었다. 우리 가족만 여섯 명에 사촌오빠 둘까지 해서 여덟 명이다. 초등학생인 나를 제외하고 아침에 흩어지면 저녁에 모여들었다.

아버지는 낮에는 막노동을, 저녁에는 야간경비를 하며 가장의 책임을 다하셨다. 저녁 도시락 배달은 내 담당이었다. 노는데 정신이 팔린 나는 엄마가 심부름을 시키면 입이 댓 발이나 나왔다. 도시락을 들고 냅다 뛰어가느라 종종 비빔밥이 되었다. ‘오구오구 우리 막내딸 왔냐.’며 초췌한 모습의 아버지는 환하게 웃으셨다.

일 년쯤 지났을까 서울에 드디어 우리 집이 생겼다. 시골 땅을 처분하고 은행 대출과 전세까지 껴서 힘겹게 마련했다. 서러움 많던 전셋집을 탈출한 것이다. 우리는 더욱 허리띠를 조여 매야 했다. 먹어도 먹어도 늘 허기진 그 무엇, 나를 가장 혹독하게 단련시켰던 것은 바로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거였다. 서울에 튼실하게 뿌리내리기 위해 밤낮없이 바빴던 우리는 서로 대화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내 몫의 삶을 스스로 살아내야 했다.

아버지 얼굴빛이 점점 까매졌다. 막노동하고 계셨기 때문에 가족들은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았다. 식사량도 부쩍 줄었다. 엄마가 개간해서 일군 밭에서 가꾼 푸성귀로 채워진 밥상이지만, 달갑게 고봉밥을 싹싹 비워내던 아버지였다. 밥숟갈로 밥을 동그랗게 만들어 한입 크게 드시는 모습을 보면 침이 꼴깍 삼켜졌다.

어느 날부터 아버지가 아랫목에 누우셨다. 복수가 차 배는 점점 불러왔고 각혈까지 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하셨고 병명은 간경화였다. 간이 손도 쓸 수 없이 망가져 개복했다가 도로 덮어졌다. 콧줄을 낀 아버지는 무척 답답해했다. ‘이것 좀 제발 빼달라.’고 애원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날도 나는 골목에서 놀고 있었다. 아버지 사진을 갖고 병원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입원한 지 일주일이 채 되기도 전에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꿈 같이 거짓말같이. 갑작스럽게 닥친 이별에 엄마는 실신했고 큰오빠는 벽에 머리를 짓찧다가 계단에서 굴렀다.

영원히 사라진 ‘아버지’란 이름은 어디서 다시 부를 수 있을까. 안양천 둑에서 짐 자전거 탈 때 뒤에서 잡아주던 손길은 어디로 간 걸까. 술 드시면 기분이 좋아져 구성지게 부르던 그 소리는 어디에서 들을 수 있을까. 그렇게 48세의 아버지는 13살인 나를 두고 영원히 찾지 못할 곳으로 가버리셨다.

며칠 전 언니와 뷔페식당에 갔다. 언니 접시 위에 소고기 한 점이 놓여있었다. 언니는 소고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마도 아버지 생각 때문일 거다. 아버지는 자식 중 고생하는 언니를 가장 애틋하게 생각하셨다. 자리 보존한 아버지가 언니를 불러놓고 한참을 망설였다.

“경자야! …… 돼지고기가 먹고 싶구나!”

 

언니는 어렵게 돈을 마련해 돼지고기 반 근을 사 왔다. 고기를 볶아 상에 올리자 아버지 눈가에 물기가 번졌다. 힘겹게 입에 넣은 고기는 고스란히 게워졌다. 그 후 엄마를 통해 아버지가 그토록 드시고 싶었던 건 소고기였다는걸 알았을 땐 이미 때는 늦었다.

“만약 그때 돼지고기 반 근마저 사드리지 못했다면, 아마 나는 평생 죄의식 속에 살았을 거야.”

 

아버지가 딸에게 차마 말하지 못했던 소고기 반 근. 나와 언니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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