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 겨울을 품다 / 최말순

꽃은 모습과 향기에 끌린다. 우리는 교육받은 것을 토대로 꽃을 바라본다. 계절과 함께 전설, 역사, 속담, 시, 회화와 벽지 무늬 등 다양한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탄생과 죽음 그 사이에 벌어지는 모든 중요한 일을 기념할 때마다 우리는 꽃을 활용한다.

 

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대신 말해준다. 기쁨의 순간에는 화려한 꽃다발이 축하의 의미를 담고, 슬픔의 자리에는 조용한 국화 한 송이가 애도와 위로의 마음을 전한다. 꽃 한 송이는 단순한 장식을 넘어,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는 매개체가 된다.

 

봄은 기다림이다. 옷깃을 여미고 추위에 떨면서 겨울의 인내를 잠시 멈추고 통도사 자장 매화를 찾아 나섰다. 몽우리는 2월의 찬바람 속에서도 다부지고 의연하다. 3월이 되면 속잎을 감싼 겉잎의 매듭이 풀릴 것이다. 꽃잎이 펑펑 터질 것이다.

 

인산인해 축제 마당에 꽃샘추위가 심술을 부린다. 산자락에 구름이 몰리고 땅을 적신 봄비가 겨울비처럼 차갑다. 시린 손으로 사진기 속에 꽃을 탐하고 매화 향을 훔친다. 산사 뜨락에서 혹한을 견딘 몸피가 튼살처럼 갈라져 있기도 하고 뒤틀린 곳도 있다. 매화 목은 혹독한 시련에도 의연함으로 향기를 머금은 봉우리를 지켜냈다. 사람들은 나무의 몸피를 보지 않고 꽃만 바라본다.

 

사천왕이 불문(佛門)의 문턱에서 눈알을 부라린다. 나는 절간 문턱을 들어서는 순간 그의 험상궂은 눈빛에 질려서 부처의 자비와 동떨어진 이질감으로 보였다. 아연실색하며 고개를 돌려버리곤 했었다. 비파, 칼, 용, 보주를 들고 요지부동이던 절지기가 몸을 비틀고 듬성듬성한 울타리를 열었다. 기와지붕 뜨락 꽃불 축제장으로 가는 나의 뒤를 뚜벅뚜벅 따른다. 무섭던 그의 눈빛이 세월을 넘긴 어느 순간부터 친숙하다. 그를 앞세운다. 귀가 열리고 마음의 빗장이 풀어지고 있음이다. 혹한을 온몸으로 견뎌 묵언 수행하여 붉은 자장 매화로 펼친 경전이라 이른다. 유여열반, 깨달음은 있으되 번뇌를 지닌 육신에 의지하는 나를 떠나며 무여열반의 매화 경전을 새롭게 바라본다. 나에게 깨달음을 전한 사천왕사는 다시 나무울타리 안으로 들어선다. 눈알을 부릅뜬 이유를 마음에 새기니 사천왕사의 자태가 엄숙해 보인다.

 

오랜 기다림 끝에 돌아와 자장 매화 앞에선 나는, 가만히 숨을 고른다. 돌이켜 보면 내게도 되돌릴 수도, 지울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형벌 같았던 혹한의 겨울이 있었다. 고드름으로 자라 얼어 굳어버린 내 삶이었다. 내 안의 고드름을 바라보며 숫돌 위에서 날을 세우고 있었지, 문득 심장의 통증을 없애 버리고 싶어 날카로운 얼음송곳으로 삶의 일부를 도려내고 있었다. 원망도, 앙탈도, 두려움도 다 내 몫이라 여겨 견뎌 이겨낸 지난겨울이다. 멈출 것 같지 않았던 겨울이 조용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나는 꽃을 피우기 위해 버틴 것이 아니라 쓰러지지 않기 위해 견뎌낸 것이다. 매서웠던 시간은 결국 봄을 위한 준비였다는 것을,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된다. 겨울을 견딘 나의 튼살을 비집고 피어난 매화는 내 인생의 봄이다. 나는 나의 봄을 만나려고 해마다 매화를 찾아 나선다.

 

법정 스님은 산사 암자에서 혼자 수행하며 뜰에 매화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눈보라 겨울을 견디고 꽃을 피우는 강인함을 바라보았다는 내용이 그의 강연과 글에 자주 나온다. 매화는 꽃을 피우면서 자기 자신을 꾸미거나 장식하지 않고 오직 자연의 순리에 맞춰 피어난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본연의 자아를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는 진정한 의미를 강조한다.

 

조선시대 선비들과 문인들은 매화를 소재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며 그들의 봄을 기다렸다. 겨울에도 굴하지 않고 꽃을 피우는 매화에서 선비의 순수하고 고결한 삶을 연상한다. 절개, 인내, 청렴의 정신을 상징하는 매화는 혹독한 추위를 견뎌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나무이므로 선비들은 중요하게 여겼다. 직업도 벼슬도 귀하고 살림이 어려웠던 그 시절 글방에서의 인내와 희망이 한 그루의 매화나무로 연상 된다.

 

봄이고 봄이다. 산사에서 인내로 피어난 봄을 만났고, 온실 하우스에서 피어난 봄을 다시 만났다. 낮은 화분에 심을 팬지와 데이지 마거리트를 골랐다. 전시장을 둘러보며 장미, 철쭉, 수국 등 제철에만 피어나던 많은 꽃이 형형색색으로 봄을 흉내 내고 있다. 봄의 참다운 의미는 겨울을 견딘 인내다. 성급한 사람들이 온실을 만들어 자연의 시간을 앞당기고 인간 모두의 누그러진 본성이 성급해져 가고 있다. 나는 겨울에서 견뎌낸 자연에서 핀 매화를 보고서야 비로소 나의 겨울과 화해하며 진정한 나의 봄을 느끼고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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