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발 속에서 / 강돈묵

 이미 찬바람은 몸을 탐하고 있었으나,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냥 겨울이면 찾아오는 추위려니 했다. 더구나 남쪽 끝 섬에서 지내다가 서울에 올라왔으니 체감되는 추위는 당연히 있을 것으로 여겼다. 으스스 밀려오는 오한은 기온 차 때문일 것이다. 찬바람의 기습에 모종의 대처가 필요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나의 몸에 온갖 기계를 들이댄 의사는 종내에는 의외의 결론을 내렸다. 폐렴이라는 것이다. 그 결론과 함께 나는 링거 줄에 꽁꽁 묶이고 병실에 영어 되는 몸이 되었다. 실은 이러자고 상경한 것은 아니었다. 정기점진 결과 조직 검사를 해 보는 게 좋겠다는 진지한 의사의 권유에 응했을 뿐이다. 하지만 조직 검사 전에 폐렴이 찾아와서 침상에 눕고 말았다. 의사는 체온만 내려가면 계획대로 조직 검사를 하자고 할 것이다.

병상에 누워 깊은 상념에 젖는다. 이까짓 폐렴이야 별거 아니지만, 바로 '악성' 운운하며 병명이 제시될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한단 말인가. 방사능 앞에 무너져 내릴 자신의 모습이 괴성을 지르며 스쳐간다. 내 지금껏 하던 일이야 버리면 그만이겠지만, 남아 있는 자들의 가슴에 뚫린 구멍은 어떻게 메워야 할지, 희미한 시야로 병실의 흰색이 들어온다. 온통 하얗다. 그 도배지에 시선을 얼마나 주고 있었을까. 별안간 벽의 하얀 도배지가 희미한 산 속의 설경으로 바뀐다. 흐릿하게 먼 데서 바라본 숲 속처럼 설화 핀 나뭇가지도 보인다. '순은純銀의 천지'외에는 다른 표현이 불가하다.

훈련소에서 교육을 마치고, 끌려온 곳이 강원도의 한 보충대였다. 한 끼 먹고, 사역하고, 때가 되면 다시 한 끼 먹는 우리의 대기 생활은 전쟁포로나 다름이 없었다. 언제 어디로 팔려갈지 모르는 초조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가끔은 불안감을 추위가 덜어내 주었다. 강가에 나가 무를 닦고, 배추를 씻다 보면 추위가 나를 독차지했다. 그러면 어디로 팔려갈지 모르는 불안감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한 주일의 초조함 끝에 배속 명령이 떨어졌다. 전혀 알지 못하는 곳이었다. 오후 시간이 깊어지자 우리 다섯 명은 한 덩어리가 되어 전령의 손에 넘겨졌다. 더블 백을 등에 메고 우리는 눈 속을 무작정 걸었다. 먼 데서 얼음장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느닷없이 허기가 느껴졌다. 찬바람에 밀려온 눈발은 볼에 차가운 기운을 더했다. 볼을 타고 흐르던 땀방울에 한기가 보태졌다. 문득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자 소금기가 진하다. 그래도 옆에 같이 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들의 입김이 그리 좋을 수가 없었다.

고갯마루를 하나 넘으니 밤으로 이어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눈발은 날렸지만 유난히 달빛이 밝은 밤이었다. 겁에 질린 나는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방위를 가늠해 보았다. 틀림없이 북으로 향하는 것 같기도 했고, 동으로 방향을 튼 것 같기도 했다. 도대체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전령은 별다른 말이 없이 걷기만 계속했다.

그가 천천히 걸으면 우리는 따랐고, 빠른 걸음이면 역시 종종걸음으로 뒤를 쫓았다. 밝은 달빛으로 인하여 눈발이 머리를 풀고 줄달음치는 것이 보였다. 어느 것은 곤두박질치고, 또 어느 것은 유순하기 이를 데 없었다. 눈발은 야릇한 분위기를 조성했지만, 아무도 그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은 없었다. 오직 꿋꿋하게 걸을 뿐이었다. 속이 탄 나는 겁에 질려 전령에게 용기를 내었다.

"요 너머가 비무장지대입니까?"

전령의 웃음이 하얗게 부서졌다.

"와 무섭나? 지난달에는 졸던 보초병 녀석의 목을 베어갔다."

사실 나는 이 전령이 불안했다. 우리를 비무장지대 안으로 밀어 넣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북쪽의 아이들과 내통하여 우리를 넘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일었다. 내가 의아한 눈빛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리자, 그는 내 머리에 꿀밤을 메기고는 다시 웃었다.

시야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내리는 눈은 우리의 방향감각을 앗아갔다. 세상이 이런 데도 있었나 싶게 생소했다. 눈이 내리고 있는 산야를 올려다보면 그 산은 하늘 속으로 숨기도 하고, 달이 산 뒤로 숨기도 하였다.

한 고개를 넘으면 더 큰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온 천지가 순은으로 덮인 깊은 산 속을 끝없이 걸었다. 이따금 나타나는 부대의 불빛을 바라보며, 이제 다 왔구나, 안도했지만 그곳도 아니었다. 그냥 스치고 가는 것이었다. 자꾸만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 산의 높이도 자라는 듯이 느껴졌다. 한번 바라볼 때마다 한 뼘씩은 자라는 게 분명했다. 점점 산이 높아지며 공포로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내가 떨고 있는 것이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길은 언제나 끝이 나려는지, 또 그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 아주 큰 고통이었다.

분명 내가 가고 이 길의 끝은 비무장지대이거나, 북쪽의 어느 땅굴 입구가 될 것이라는 추측이 나를 더 무섭게 만들었다. 초년병 시절 배속될 때 겪었던 공포의 추억에서 벗어난 것은 간호사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의해서였다.

"열이 내렸네요. 이제 조직검사를 해도 되겠네요."

조직검사, 조직검사, 조직검사. 그래 난 내 몸속에 달라붙어 있는 균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이곳에 와 있었지. 이 검사를 마치면 눈 속으로 끝없이 헤매던 시련의 세월이 끝이 날까. 오히려 눈이 훨씬 더 쌓인 깊은 산 속으로 빠져드는 것은 아닐까. 그 산 너머에는 내가 누울 수 있는 한 평의 땅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고, 그곳이 내가 마침내 멈춰 서야 할 곳은 아닐지.

스르르 마취되어 가는 의식 저쪽으로 의사의 목소리가 멀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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