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내버스를 기다리며 / 장미숙

 

버스는 이십 분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서쪽으로부터 연둣빛 바람을 몰고 오는 건 자동차뿐이었다. 여덟 시가 넘자 마음이 급해졌다. 모과나무집 은경이 엄마 이야기로는 버스가 여덟 시에 온다고 했기에 포기하기는 싫었다. 삼십 분까지 기다려보고 오지 않으면 택시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반듯하게 닦인 도로와 들판은 호젓했다. 탁 트인 사방으로 선선한 아침 바람이 불어왔다. 마을 꼭대기 봉두산의 정기를 받은 바람은 연두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온갖 생명에 생기를 넣었을 것이다. 마을을 한 바퀴 돌다 저수지를 거쳐 가로수에 당도한 바람에는 풀냄새가 스며 있었다.

도로는 완만한 곡선으로 휘어졌다. 구불구불한 도로가 퍼즐처럼 마을과 마을을 잇고 있었다. 훤한 지형이 아니라 어딘가에 작은 마을 하나 숨어 있을 듯 보듬고 돌아가는 길이 아늑하고 자연스러웠다. 도로 양쪽으로는 동백꽃이 찬란했다. 심은 지 오 년쯤 되었다는 동백은 아담한 키에 꽃봉오리를 소복소복 매달았다. 봄빛이 올라오기 시작한 계절, 동백은 봉오리를 부풀리며 만개의 시간을 기다리는 듯 수굿했다.

마을을 바라보았다. 안쪽에서가 아닌, 동구 밖에서 마을을 찬찬히 살펴보기는 오랜만이었다. 고향에 가면 매번 누군가의 차에 앉아 오갔기에 입구에서 버스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미련이 남으면 고개 돌려 잠깐 봤을 뿐 지나면 그뿐이었다. 특히 군내버스를 타겠다고 마을 입구에 있어 보기는 몇십 년 만의 일이었다.

택시를 탈 수도 있었지만, 굳이 버스를 택했다. 고향에 가면 꼭 해보고 싶은 체험 중 하나였다. 차 없이 혼자 고향에 온 것도 그럴만한 이유가 되었다. 고향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떠날 채비를 서두른 것도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마을을 오가는 버스는 하루에 세 번 정도 있다고 했다. 아침 차를 타야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삼십 여분의 시간은 나를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데려다 놓았다. 많은 것이 달라졌다. 고향을 떠난 지 40년이 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때는 신작로라 불리는 도로에서 흙먼지 부옇게 일으키는 군내버스를 기다리곤 했다. 퍼런색 낡은 버스에 안내양이 매달려 문을 탕탕 두드리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다.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은 객지에 살던 언니 오빠들이었고 우리는 그들을 보며 미지의 세계를 꿈꾸었다.

도시로 거처를 옮기고부터 군내버스는 명절에만 타는 고향 방문용 교통편이었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도로는 흙먼지로 뒤덮였고 차는 덜커덩거리며 울퉁불퉁한 비포장길을 달렸다. 사람들로 꽉 들어찬 버스 안에서 행여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창이라도 만날까 봐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하던 때, 고향 마을까지는 먼 길이었다.

마을 입구에 내리면 커다란 바위가 반겨주었다. 마을 이름이 새겨진 바위를 보면 뭔지 모를 감정이 솟아올랐다. 각자 흩어져 살아도 근본을 잊어버리면 안 될 것 같은 책임감 같은 게 느껴졌다. 한 곳에서 나고 자란 동무나 형제와의 끈끈함을 심어주기에 바위는 품이 넉넉했다.

초입에 막걸리와 조잡한 생활용품을 팔던 점방이 있었다. 간혹 그곳에서 부침개 냄새라도 나는 날이면 어른 두어 분이 찌그러진 술잔을 기울일 때였다. 불콰해진 노랫가락의 탁한 여음이 마을 안쪽까지 따라붙었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저수지가 있었다. 한때 아이들의 놀이터로 제격이었던 저수지는 마을의 변화를 알려주는 척도였다.

아이들의 말소리와 발걸음이 닿지 않는 저수지는 풀로 뒤덮였다. 소 풀을 먹이거나 둑에서 미끄럼을 타던 아이들이 사라지자 저수지는 스스로 황폐해졌다. 물빛도 칙칙해졌고 노을도 더는 아름답지 않았다. 그 흔한 염소며 황소도 보이지 않았다. 해마다 풀이 우거지더니 급기야는 길이 막혀 섬처럼 존재했다. 마을에 아이들이 사라지면서 생긴 현상이었다.

낡은 버스가 지나다니던 신작로에는 코스모스가 빼곡했다. 흙바람을 맞으며 흔들리던 코스모스 사이로 경운기가 탈탈거리며 지나가고 자전거가 쉭쉭 소리를 내며 굴러갔다. 가로수라고 해봐야 미루나무나 아까시나무가 전부였다. 여름 한낮 땡볕을 피하려고 아까시 이파리를 꺾어서 화관처럼 머리에 둘러쓰고 다니기도 했다.

길은 변천을 거듭했다. 한때는 울력을 통해 굵은 돌을 파내고 파인 곳을 메꾸었다. 집마다 한 사람씩 차출되어 흙을 져 나르고 돌멩이를 팠다. 그래도 길은 비만 오면 진흙탕이 되었고 큰비에는 씻겨내려 무너지기 일쑤였다. 아스팔트가 언제쯤 깔렸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다. 도로가 정비되면서 꽃도 나무도 사라졌다. 한동안 길은 푸른빛도 붉은빛도 존재하지 않아 황량했다.

이제 그 자리를 동백이 차지했다. 예전에는 가로수로 동백꽃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시대의 변화는 숨은 듯 피어나는 꽃을 대로변까지 불러내었다. 삭막함을 꽃의 정서로라도 채우고자 하는 바람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삼십 분을 기다리는 동안 전에 없던 광경을 보았다. 산뜻한 노란색 미니버스가 나타난 건 뜻밖이었다. 차 옆면에 ‘군내통학버스’라고 쓰여있었다. 시골에 흔치 않은 아이들을 실어나르는 통학용 버스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며 중학교도 아이들이 몇 명 되지 않는다고 들었다. 어쩌면 곧 폐교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나마 통학버스에 탄 아이들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서 다행이다. 벅찬 마음으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여덟 시 삼십 분, 군내버스가 나타난 시각이었다. 제시간보다 삼십 분이나 늦게 온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생각처럼 허름하지 않았고 노인 다섯 분이 차지하고 있는 안은 오히려 넓었다. 터미널까지 걸리는 삼십여 분 동안에도 나는 고향 마을 입구에서 떠나지 못했다. 언제 또 군내버스를 탈 수 있을까. 마음 한쪽을 바람이 휑하니 쓸고 지나갔다.

 

<인간과 문학 202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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