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고택秋史古宅에서 / 정목일 

 

오월 화창한 봄날에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는 추사고택秋史古宅을 찾아갔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주택일 뿐 아니라, 조선 말의 문신으로 실학자, 서화가였던 추사 김정희를 마음으로 만나고 싶었다.

옛 주택은 배산임수背山臨水를 염두에 두고 지어졌다. 앞으로 펼쳐진 넓은 평야에 낮게 솟은 740m의 용산이 배산背山이 되고, 삼교천을 임수臨水로 삼은 추사고택은 충남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돼 있다. 이 집은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金漢藎이 영조의 사위가 되면서 하사받은 저택이다. 추사는 이곳에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다.

추사고택에서 조선 말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명필名筆로 문화계의 중심에 있던 김정희의 삶을 생각한다. 추사의 일생은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1840~1848년간 제주도에서 9년, 1851년 함경도 북청에서 2년 간을 유배지에서 보내야만 했다. 벼슬살이와 유배생활로 이어지는 영예와 비탄이 뒤섞인 일생이었다.

추사의 명작인 <세한도歲寒圖>를 본다. 초당 앞에 소나무는 어깻죽지가 꺾어져 있다. 뒤편의 잣나무는 고개를 들고 청청하다. 귀청을 울리는 바람 속에 어깨 무너져 내린 소나무는 구부정하지만 푸른 기세는 여전하다. 일체의 수식과 과장을 떨쳐버렸다. 가진 것을 다 내놓아야 혹독한 눈보라와 혹한을 견뎌낼 수 있나 보다.

<세한도>는 더 이상 축약할 수 없는 세계이다. 초당과 앞뒤 편에 소나무 두 그르와 잣나무 두 그루로 삼각구도를 이룬다. 세 개의 공간 분할로 생겨난 여백은 침묵 속에 빠진 산의 모습이며, 자신의 사색 공간임을 보여준다. <세한도>는 고도의 압축과 감정의 절제를 보여준다. 유배 생활의 삶과 풍경을 담아 놓은 마음의 자화상自畵像이 아닐까.

추사는 제주 유배지에서도 청나라의 최신간 서적을 읽을 수 있었다. 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이 중국에서 구해와 보내주었다. 그는 제자로부터 120권 79책에 달하는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을 받고는 크게 감격했다. 추사는 답례로 작은 집 옆에 벼락 맞아 허리 꺾인 낙락장송이 겨우 한 가지 비틀어 잔명을 보존한 형상을 그린 <세한도>를 이상적에게 주었다.

추사는 중국 서체를 흉내 내온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보곤 했다. 중국 문화권에 빠져서 남의 문화를 답습하고 흉내 내던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추사는 우리나라의 산, 강, 들판, 한국인의 성격에 맞는 선과 형태와 느낌을 글씨에 담아내고 싶었다. 우리 자연과 민족의 마음이 담긴 서체를 찾고 싶었다. 당대의 명필이란 허울과 명성을 벗어버리고, 우리나라 자연과 기후와 민족의 마음으로 빚어낸 글체로 써보고 싶었다.

산 능선, 강물의 유선流線, 기와집 초가지붕의 선들이 이루는 온화하고도 힘찬 맥박과 감정을 서체에 담아보고 싶었다. 추사 서체는 제주도 등 유배 생활에서의 고독과 삶의 성찰과 자각의 발견이며 소산이었다. 대화자도 없는 유배지에서 절대 고독과 명상으로 얻은 깨달음의 필법이었다.

추사고택 마당에서 40대의 아버지와 중학생쯤 돼 보이는 아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기둥에 붙여 놓은 주련의 글씨를 보며, "우리나라 최고의 글씨를 자세히 보아라."고 말한다. "아버지, 현대는 글씨가 소용없어요. 문자판을 치기만 하면 돼요." 중학생 아들이 가볍게 대답한다. '글씨' '서예'라는 개성의 예술이 인터넷 시대를 맞아 사라져버렸음을 느낀다. 어느덧 개인 서체가 사라지고, 필요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추사고택에서 당대 최고 명필을 바라본다. 붓으로 표현되는 '서예書藝'는 인터넷 시대에 진입하고부터 사라져가고 있다. 현대는 손가락으로 문자판을 치면서 자신의 일과 생각을 기록하는​ 시대이다. 개인의 서체가 필요하지도 않다. 개인의 독창적인 생각과 감성이 더 필요할 뿐이다.

추사고택에서 조선시대 후반기 최고 지식인이었던 김정희의 붓과 독창적인 깨달음의 필법을 본다. 중국의 필체에서 벗어나 우리나라 산, 바다, 강 등 자연 모습과 마음을 담아낸 추사체를 본다. 추사고택에 와서 '붓'의 시대가 가고 '만년필'이나 '펜'의 시대도 사라졌음을 느낀다. 현대인들은 인터넷에 문자판을 치면서 자신의 삶과 생각을 기록한다. ​

당대의 명필​ 김정희가 일생의 체험과 삶의 깨달음으로 얻어낸 추사체 글씨를 본다. 한자이지만, 우리 자연의 멋과 마음이 담겨 있음을 느낀다. '추사고택'에 민족의 얼과 마음이 담긴 추사체 글씨가 기둥마다 환하게 밝혀져 있음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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