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꽃처럼 / 김잠복

 

 

바람 끝이 맵지만 분명 봄이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 속에 매화향이 ‘훅’ 다가와 안긴다. 아파트 화단은 봄 햇살에 가장귀마다 꽃눈 잎눈을 틔우고 벌을 모은다. 동네 꽃집 앞에는 팬지와 바이올렛, 수선화며 비올라 화분이 이름표를 달고 주인을 기다린다. 지나치던 젊은 여자가 발을 멈추고 그중 마음에 드는 화분 하나를 골라 손에 든 걸음이 스타카토 리듬을 탄다.

봄은 언제나 꽃을 앞세우고 찾아든다. 이제, 겨울은 묵은 계절의 뒤안길로 물러났다.

이태 전 이맘때 이삿짐을 쌌다. 봄이면 서둘러 찾았던 태화강변 꽃길은 마음뿐이었다. 머릿속은 온통 이삿짐을 꾸리는데 가 있었다. 꽃구경을 나설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서른일곱 해 간 삶의 뿌리를 깊숙이 내리고 살던 울산을 떠나 서울 상경을 마음먹었다. 주변에서는 ‘산 사람 코 베어 가는 서울.’이라며 가위표를 그었지만, 혈육 앞이라 망설이지 않았다. 아들네 집 근처에 거처를 얻고 밥솥을 서울 부뚜막으로 옮겨 걸었다.

결국, 서울에다 짐을 풀었다. 주인을 기다리던 빈 집, 건조한 아파트라는 사각 시멘트 상자 안에 가져간 세간을 두서없이 내렸다. 투박한 지방 살림살이는 도시의 수납장이 부담스러웠던지 엉거주춤 불편한 기색이었다. 집 안팎을 서성대는 공기는 이방인을 멀뚱멀뚱 건성으로 대했다. 가슴속에 마른 바람이 일었다.

지척에 아들네가 있다지만, 나는 분명 이방인이었다. 맞벌이로 부산한 아들부부와 손자 셋을 거들고 프로 사랑꾼이 되리라 했던 다짐은 손가락 사이 모래알처럼 빠져나갔다. 몸은 거실 바닥에 퍼질러져 초점을 아무데나 던져두고 있을 때가 잦았다.

멀리서 내려다보는 대도시 빌딩 숲은 거만하고 당당했다. 내 쪽을 향해 늘그막에 무에 서울 살이냐며 윽박지르듯 따지듯 다그쳤다. 순진한‘시골 쥐’, 불쌍한 ‘개똥벌레’, 무지한 ‘바보 멍청이’라고 실실 코웃음을 쳐가며 놀렸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 들수록 자연을 벗 삼아 귀향이나 귀촌을 꿈꾸는 이들의 말을 왜 어찌 귓등으로 스쳤던가. 나이 들어 뜬금없이 서울은 무슨 서울이란 말인가. 그것도 내 스스로 자청했으니 어쩌랴. 이건 순전히 내 무지함이 부른 ‘성급한 결정’이었다. 도통 나 자신을 용서 할 수가 없다.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때는 마른입만 다셨다. 이제 와서 되돌리기엔 늦었다. 이미 던져진 주사위, 쏘아버린 화살, 엎질러진 물이 아니던가. 그때마다 시선은 습관처럼 거실 창 너머 화단에다 초점 없이 던져두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화단 가장자리를 환하게 지키고 선 빨갛고 노란 꽃빛이 시야에 꽂혔다. 자리를 박차고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창문을 젖히고 얼굴을 내밀었다. 작달막한 가장귀마다 선홍빛 꽃물을 흘리는 매화가, 노란색 물감을 팡팡 덧칠한 산수유가 그윽한 향기를 사방으로 날리고 있었으니…. 꽃향기는 열어둔 문틈을 비집고 들어와 온 집안에 향기를 가득 채웠다. 조금 전까지 천장을 맴돌던 잡다한 회색 기운이 순식간에 줄행랑을 쳤다. 머릿속이 맑게 개었다.

꽃들은 일제히 내 쪽을 향해 말을 걸어주었다. ‘약해 지지 말아요, 서로 친구 해요.’라는 응원의 말은 나만 알아들었다. 머리를 끄덕이고 입 꼬리를 살짝 올려서 ‘고마워’라는 화답을 보냈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젖혀 올려다본 하늘바다는 하얀 구름 배를 띄우고 천천히 노를 저었다. 마음속에 잔잔한 평화가 찾아들었다. 햇살은 거실안으로 깊숙이 들어와 한참동안 머물렀다.

어느새 서울에서 세 번째 봄을 맞는다. 화단을 지키고 선 수목은 훌쩍 몸피를 키웠다. 이른 봄부터 꽃 문을 열어 그윽한 향기를 사방으로 날려 보낸다. 벌과 햇살 친구를 불러 모아 달달한 데이트가 봄내 이어진다. 해가 더해질수록 더 성숙되고 요염한 빛깔과 향기를 선물하는 화단은 이제 꽃밭으로 변해간다. 꽃밭을 바라보고 있으면 영혼은 맑고 선하고 젊어지는 기분이다.

거기다가 날마다 금지옥엽 손주 셋이 몰려와 집안을 놀이터로 만들고 재롱을 떠는 바람에 하루, 한 달, 한 해가 책장 넘기듯 금방이다.

큰애 ‘현서’는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들어간다. 사리 꽃처럼 곱고 여린 청순가련형으로 천상 여자다. 머리가 영특하고 하는 짓이 참하니 아무한테나 귀여움을 받을 것이다. 눈도 코도 입도 콩처럼 동글동글한 둘째 ‘윤서’는 TV화면 ‘어린이 만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콩순이’가 영판이다. 유독 말씨가 예뻐서 상대를 홀딱 반하게 하는 마력을 가졌다. ‘태어나길 참 잘했어’라고 말했다는 윤서를 어린이집 선생님은 두고두고 머리를 쓰다듬으신다. 또래들한테 인기도 당연 ‘짱’이다. 막내 ‘진서’는 사내아이치고 웃음이 헤프고 마음이 여린 것이 탈이다. 놀이터에서 ‘헤헤’거리며 신명나게 놀다가도 낯선 아이가나타나면 금세 표정이 굳어진다. 하나, ‘아기상어’노래만 틀어주면 엉덩이를 좌우로 실룩샐룩 흔드는 흥이 많은 남자다. 어쨌든 제 부모를 닮을 테니 반듯하고 선한 사내로 커 갈 것이다. 화단에 핀 꽃이, 금쪽같은 손자들이 나름의 색깔과 재롱을 떨어 나한테 위로와 즐거움과 의미를 선물한다.

다시, 봄이다. 얇은 봄 햇살이 거실가득 들어온 날은 내 안의 나를 불러놓고 마주앉는다. 나는 그 누구에게 어떤 빛깔과 향기와 의미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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