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시간 / 임춘희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하늘 한가운데 떠 있는 뭉게구름은 갈 길을 잃어버렸는가. 구월의 햇살은 카페 처마 끝에서 고개 떨구고 나를 내려다본다. 선선한 바람은 내 목덜미를 끌어당긴다. 그러나 그런 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코를 박고 책 속으로 자꾸만 빠져든다. 읽으면 읽을수록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책장을 넘기고 싶다.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드러낸 수필집. 읽고 있는 책의 저자는 이미 몇 년 전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보고 싶다. 아니 그리워진다.

집을 나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아들 내외 2층으로 올려보내고 서둘러 집안 소지를 끝냈다. 맛있는 것 한 가지라도 더해 먹이고 싶은 것이 엄마의 마음이리라. 그러나 자식은 결혼하면 손님이다. 한 지붕 밑에 살아도 밥솥이 다르고 생활하는 공간이 다르니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면 서로가 편하다. 아직 손주가 없어서 그런 입장을 잘 모르지만,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명절이나 휴가철에 자식은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고 했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책 몇 권을 가방에 넣고 팔공산으로 향한다. 얼마 전 지인과 함께 갔던 카페가 마음에 들어 오후 시간 내내 있을 요량이다. 그 카페는 자연 그대로를 살려 휴양림 같은 곳이라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다. 이른 점심시간이지만 자리마다 사람들이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나도 한적하고 그늘이 짙은 곳에 자리를 잡아 놓고 커피와 파스타를 시킨다. 먹고 싶은 것을 골라 먹는다는 것이 이토록 행복한 일일 줄이야.

업무로 인해 사람을 만나 식사하면 내 의사와 상관없이 상대방 입맛에 맞는 것을 고른다. 형체만 있고 진정한 내가 없는 식사 자리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러고 보면 세상살이가 쉬운 건 아니다. 더불어 살아가면서 자신의 권리만 주장할 수 없는 일이니까. 두 사람이면 모이면 오 십 퍼센트, 네 사람이면 이 십오 퍼센트 자기주장을 할 수 있으면 그것이 곧 백 퍼센트 주장하는 거와 다름없다. 그런데 오늘은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어 음식을 선택할 때도 책을 읽을 때도 음악을 선곡할 때도 권리 주장할 수 있는 것이 백 퍼센트이리라. 복잡한 생활하다가도 가끔 오늘 같은 시간을 가져 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힌남노 태풍으로 인해 경주와 포항에 피해가 엄청나다는 소식이 스마트폰에 속보로 올라온다. 남의 일 같지 않아 마음이 무겁다. 천재지변이 어디 그들에게만 있으라는 법은 없으리라. 태풍 피해로 애간장 녹이는 지역에 봉사라도 가야 하는 것 아닐까. 스마트폰은 자꾸만 알람을 보낸다. 지인들이 보내온 카톡이 뜰 때마다 읽던 책에 집중하지 못하고 신경이 분산된다. 미안한 감은 있지만, 아예 스마트폰 전원을 끈다.

주문한 음식이 드디어 나왔다. 카페 직원은 탁자 위에 파스타와 커피 그리고 갓 구운 빵을 가지런하게 놓고 간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지 않았는가. 읽고 있던 책도 덮고 커피와 파스타를 음미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보다 상대를 위해 음식을 만들어 준 적이 더 많았다. 앉아서 받아먹는 음식이 이렇게 좋은 줄 몰랐다. 식사 후 디저트 내어 줄 일도 설거지할 일도 없으니 왕비 대접받는 것 같다.

소나무가 우거진 곳이라 솔향이 코 안으로 훅 들어온다. 이름 모를 새들은 서로 제 목소리가 예쁘다며 지저귀고,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바람이 밀고 가는 대로 밀려간다. 조금 전 읽고 있던 책 속으로 다시 빠져든다. 평생 사람들의 뇌만 고쳐주며 살았던 분이 자신의 건강은 돌보지 못하고 불치의 병 위암에 걸려 세상을 떴다. 저자는 나처럼 일에만 빠져 살아온 것 같다. 그러니 직업이 의사인데도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못하고 많은 나이가 아니었을 때 병을 얻어 세상을 뜨지 않았는가.

하루 24시간을 48시간처럼 일하며 보냈던 나의 지난 시간이 소록소록 물안개처럼 떠오른다. 나는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스스로 일을 만들고 사랑하며 살아온 것이다. 요즘은 일상이 버겁다고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그러다 보니 오늘처럼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가지는 게 소중하고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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