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 있는 그림자 / 유혜자

 

 

30여 년 전 해외여행 때, 한밤중에 잠이 깨어 있어났다가 내 그림자에 놀란 일이 있었다. 흐릿한 수면등 뒤에서 시커먼 그림자는 방안을 꽉 채우고 있었다.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생각했다. 마음속에 숨겨둔 어두운 비밀이라도 있는 것일까. 나는 태연한 척하면서도 마음의 그림자를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인간의 성숙이 완성되는 것과 해가 가장 높이 뜨는 정오에 같은 의미를 둘 수가 있을까. 행복으로 말하자면 좋아하는 대상에 도취될 때 너와 내가 하나가 될 때 행복할 것이다. 그때 그림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가슴속에 간직하게 되기 때문에 그 그림자가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가 행복할 때 나도 행복하고 그가 불행하면 나도 서글프다. 그가 가는 곳에 나도 동행하게 되면 행복할 것이다.

정오의 해 아래서는 그림자가 없다. 인간도 고뇌와 시련을 이겨내고 나면 평화로워져서 어두운 그림자가 자취를 감추게 될까. 그림자는 다양한 각도에서 빛이 비칠 때에 여러 형태나 길이로 달라지지만, 부정적인 어두움으로서의 그림자는 짧을수록 아니 아예 없어지는 정오를 생각하게 된다.

욕심이 많아 자신의 처지도 모른 채 집착으로 그림자처럼 일이나 사람을 따라다녀 괴로움을 낳는 것을 보게 된다. 집착의 굴레에서 마음속으로 끈질기게 따라다니면서 아파하고 파멸하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실제로 내가 아는 지인은 지독한 열애 끝에 헤어진 사랑의 그림자가 따라다녀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섬으로 떠났다. 자기 사랑이 아니라고 등을 돌리고 떠났던 여인에게서 멀어져서 섬에 가면 어느 정도 평온해질 것으로 알았다. 바라다보이는 건 아득한 수평선, 손을 들어 올리면 금세 잡아질 것 같은 수평선은 눈길 줄 때마다 조금씩 더 멀어지고 마음으로 붙잡지 않으면 모든 것은 자꾸만 달아날 것만 같던 섬. 문제는 자신의 마음이었지 섬에서의 은둔과 고독은 더욱 외로운 존재임을 확인시켜주는 것 같아 다시 돌아왔다고 했다.

 

언젠가 내가 너를 잃게 되어도

그래도 너는 잠들 수가 있을까.

보리수의 수관처럼 네 머리 뒤에서

언제까지나 사랑을 속삭이는 내가 없이도

 

릴케의 시구 같은 애련함이 존재하는 사랑이야말로 영원할 것이다.

그림자는 마음 안에 잠재해 있던 무엇에 대한 지극한 열망이 생명을 얻어 태어난 나의 분신分身이 아닐까. 애지중지할 수는 없지만 그 그림자의 존재를 소중하게 받아들이려고 한다. 스스로 타오를 수가 없어 불빛 곁에서 피어나는 허상虛像이라고 비웃지는 말아야겠다. 날개 안에 아름다운 빛깔을 숨기고 있는 예쁜 새처럼 춤을 출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어디엔가 환상과 노래까지 함께하며 살 수 있는 집에 안주할 수 없는 외로운 존재이다. 그림자는 집을 꿈꾸지만 끝없이 어리석게 삶의 뒤통수나 바라보는 공허한 존재인 것이다.

나는 한때 이름 모를 병에 시달려야 했다. 양의에게 진찰을 받았는데 이렇다 할 병명이 나오지 않았다. 연세 높은 한의를 찾아갔을 때 오랫동안 맥을 짚어본 노 의원은 내 병이 마음에서 비롯된 것 같다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들려주었다. 나는 명사를 섭외할 능력도 없으면서 유명 프로그램에 샘을 냈고, 막상 닥쳐도 감당하지 못할 텐데 어려운 것에 대한 무모한 욕심을 내지 않았던가. 그리움의 사슬을 끊을 수 없어 애태웠고, 용서해도 될 만한 잘못을 저지른 이에 대한 미운 마음으로 괴롭지 않았던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 진리에 익숙하면서 빛을 향하는 마음을 지니지 않은 채 살아온 것을 뉘우쳐야 했다. 한동안 마음속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서 몸까지 괴롭혔음을 깨달았다.

진짜 그림자는 덧없는 거품과 같이 무게도 없이 허무하지만, 마음속의 그림자는 격렬한 몸짓이 없어도 괴롭게 흔들리게 하고, 고뇌, 풀무질까지 서슴지 않았다. 크고 작은 파도가 물러난 뒤의 넓고 평온한 가슴을 지닌 바다. 고요한 일몰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황홀한 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바다에서 오래 머무르고 싶다.

최근 친구들의 모임에서 무서운 것에 대한 얘기가 나왔는데, 어떤 친구는 치매가, 또 고독이라는 친구도 있었다. 젊은 날 해외여행 때 내 그림자가 무서웠다는 나의 고백에, 한 친구는 그림자의 색깔이 시꺼먼 것이라 그랬을 거라면서 웃는다. 다른 친구는 함께 갔더라면 그림자에 색깔을 칠해줬을 텐데, 하고 아쉬운 표정까지 지었다. 어쩌면 무미건조해서 외롭게 빛깔 없이 사는 내겐 검은 그림자가 어울린다고 대꾸하는 마음속이 편안치가 않다. 넉넉한 나이에 이른 지금도 마음속의 그림자가 걷히지 않아서였을까.

딸들에게 왕국을 나누어준 후 황량한 광야로 쫓겨난 리어왕은 비로소 묻는다. "여기 누구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가? 이건 리어가 아니야. 네가 누구라고 말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 옆을 지키던 광대가 대답한다. "그건 당신의 그림자요."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의 마지막에 나오는 장면이다. 그림자가 보이든 안 보이든 우리 인생은 그림자를 쌓아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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