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싹 틀 무렵 / 고임순 

 

얼어붙었던 겨울을 밀어내고 살며시 다가선 입춘, 우수도 지나 어느덧 경칩이다. 아직 쌀쌀한 꽃샘바람이 목 언저리를 파고들지만 햇빛은 완연한 봄기운으로 어깨를 포근히 감싸 안는다. 만물이 소생하는 생명의 계절이다.

'입학을 축하합니다' 현수막이 나부끼는 교문을 들어서니 넓은 운동장 위로 하늘이 탁 트인다. 학부형들에게 둘러싸인 꼬마 신입생들이 교장선생님의 훈시가 끝나자 제각기 병아리 떼처럼 종종걸음으로 담임선생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어미 품을 떠나 처음으로 하늘을 나는 새처럼 설레는 몸짓들이다.

오늘은 3월 4일, 손녀 승연(承延)이가 연희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날이다. 운동장을 한 바퀴 돌며 손녀의 반을 찾아 나선 나는 선생의 호명에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네" 하고 대답하고 있는 손녀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보자 활짝 웃으며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어 흔들어댔다. 나는 카메라를 들이대고 초점을 맞추었다. 렌즈 속에 웃고 있는 손녀의 얼굴이 귀엽다.

가지런한 단발머리에 꽃핀을 꽂은 갸름한 얼굴. 유난히 반짝거리는 눈에 초점을 맞추어 셔터를 눌렀다. 앞으로 저 눈은 앎의 세계를 향해 얼마나 크게 열릴 것인가. 60년 전의 내 눈빛도 저러했을까.

일제하의 초등학교 입학식 날은 4월이었다. 활짝 핀 꽃이 온통 하늘을 가린 벚꽃나무 아래서 우리들은 손을 잡고 선생을 따라 "사꾸라, 사꾸라" 하고 노래 불렀다. 순수 추억에는 날짜가 없고 계절만이 있는 것일까. 눈부시게 화사한 꽃빛은 이상하게도 어린 마음을 공포감과 함께 얼마나 주눅 들게 했는지 모른다. 가슴에 훈장처럼 창씨개명한 이름표를 달고 그 아래 늘어뜨린 손수건으로 흘러나오는 콧물을 연신 훔치며 목청을 돋우며 불러대던 노래 '사꾸라'.

"우리들은 1학년 어서어서 모이자" 손녀의 낭랑한 노랫소리가 나를 먼 기억에서 돌아오게 했다. 짝인 개구쟁이 사내아이와 손을 잡고 열심히 유희를 하고 있는 모습이 앙증스럽다. 모두들 복숭아빛 얼굴로 단정히 옷을 입고 우는 아이도 코흘리개도 오줌싸개도 없는 세련된 어린이들이다. 그들은 모두 자유다. 내 땅에 당당하게 서서 우리말로 노래 부르는 자유. 축복 받은 새싹들이다.

속박된 부자유 속에서 자유를 갈망했던 시절, 우리는 매일 아침 일장기가 휘날리는 교정에서 '기미가요'를 불렀고 꼭두각시처럼 황국식민선서를 외쳐댔다. 신사참배를 강요당하며 내선일체, 미영격멸, 인고 단련의 테두리 속에서 우리들은 일제의 밀봉교육으로 만들어져 갔다. 우리말을 사용했다고 운동장을 열 바퀴 도는 벌을 받았을 때, 어제부터 굶었다는 순자는 급기야 비실비실 쓰러지고 말았다. '왜? 어째서?' 우리들의 의문은 하늘에 퍼지고 날로 골이 깊어갔지만 그것을 풀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 삶에서 누구나 한 번은 초등학생이 된다. 6년 과정의 첫발을 내딛는 일학년은 장차 무엇이 될 것인가 가늠하는 떡잎이다. 이제 유년의 옷을 벗고 10대의 대열에 끼게 되는 야릇한 기쁨도 맛보게 되는 여덟 살, 혼자서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꿈에 부푸는 시절이다. 손녀의 앞날을 그려보니 눈앞에 지난 격동의 세월이 또다시 펼쳐졌다.

며칠 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세기를 넘어서, 21세기 한민족 대항해 시대전'을 관람했는데 바로 내가 살아온 세월이 거기 있었다. 1900년 한반도 운명이 기울면서 국권을 상실당하고 10년, 항일운동은 전개됐지만 점점 일본의 간교한 마수에 넘어간 우리나라는 종국에 말과 성을 잃고 치욕적인 식민지 생활로 들어갔다. 36년간을. 그러나 1945년 광복과 함께 우리는 또 분단의 비운을 맞는다. 그리고 1950년 동족상잔의 처참한 전쟁을 치렀다. 그리고 1960년 근대화로 향한 몸부림으로 세계로, 해외로 뻗어가면서 민주화운동으로 벽을 넘어서 지금 세기의 전환기를 맞고 있다.

전시관 아래층에서 5층까지 생생하게 되살아난 격동의 세월을 돌아보면서 '사꾸라' 노래로 시작한 새싹이 그 노래만 부르다가 시대의 아픔을 뛰어넘어 지금 한 그루 고목에 매달린 버찌에 불과한 나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랬다.

내가 감당했던 그 숱한 세월은 그 시대에 태어난 내가 겪어야만 했던 현실이 아니었던가. 그 시절 그 하늘 아래 숨 쉬고 살아야 했던 내가 끌어안아야 할 내 몫의 세월이었다.

전설처럼 먼 과거, 떠나가 버린 아득한 옛날의 순간들은 흘러가버린 거대한 죽음인가. 과거를 되돌아보는 작업은 그러나 미래의 비전에 대한 모색이 동반되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고 했다. 손녀의 손을 잡고 운동장을 걸어 나오면서 그 미래를 그려보았다.

자유 속에서는 자유를 모른다. 빛 가운데 빛을 모르듯이.

자유가 무엇인지 모르는 손녀의 얼굴은 너무나도 천진하다. 내 지난 세월을 보상해 줄 오늘의 새싹은 내 몫까지 살아서 싱싱한 대목으로 자랄 것이다. 탐스러운 열매도 맺힐 것이다. 그래서 내가 자유 속에서 한껏 피고 싶었던 욕망을 채워줄 것이다.

교문을 나서는데 등나무 싹이 파릇파릇 돋아난 것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인생의 봄은 돌아오지 않지만 자연의 봄은 어김없이 돌아온다. 그러나 인생의 봄도 돌아온다고 믿고 싶다. 내 봄은 손녀가 꽃피워줄 것이 아닌가. 나는 손녀의 손을 다시 힘주어 꼭 쥐고 교문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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