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을 구하다/ 이경은
손으로 쓴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 신선함이라니. 책장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힘들 때 도와줘서 고맙다는 내용인데, 따스한 군고구마를 먹는 기분이 들었다. 당장 전화를 걸어 얘기를 나누고도 싶었지만, 굳이 편지로 보낸 그녀의 마음을 아껴야 할 것 같았다.
예전엔 누구나 다 연락하려면 편지를 썼고, 빨간 우체통에 집어넣으면서 손끝이 조금 떨리기도 했다. 돌아가는 길 내내 뒤를 돌아보고, 마음은 우체통 옆에 파수꾼처럼 밤새워 세워두기도 했다.
편지를 보내고 돌아서는 순간부터 기다림이 시작된다. 기다림, 편지에는 ‘기다림의 공간’이 따라붙는다. 편지가 아름다운 것은 기다림의 마음이 동봉되기 때문일지 모른다. 어떤 답이 올 건지, 답장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며 문밖을 서성대는 발걸음 소리가 담겨 있다. 그런 정경이 그립다. 시간만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저 느린 마음도 함께 놓친 것 같아서.
연암의 서간첩을 번역한 책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며》를 보다가 낱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 한글은 ‘수필’인데, 산문인 수필과 한자가 달랐다. 호기심이 발동되어 눈을 책에 붙였다. 수필手筆이다. 이것은 편지이든 원고든 자필로 된 것들을 말한다. 수필隨筆과는 그 뜻이 전혀 다르다. 언어의 유희랄까. 누군가가 연암을 몹시 존경하여 그가 손으로 쓴 수필을 모으려 애를 쓴 모양이다. 연암의 수필을 모아 무엇을 구하고자 하였을까. 단순한 수집광이거나 돈이 있어 재력을 과시하러 모은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문학사상 최고 문장가이자 사상가인 그가 쓴 문장 때문이거나 생각의 힘과 절제된 언어, 생명력 넘치는 비유, 세상에 대한 냉철한 시선을 흠모해서였으면 좋겠다.
<매미 소리가 책 읽는 소리>에서 “매미가 시끄럽게 울고, 땅속에서 지렁이가 소리 내는 것이 시를 읊고 책을 읽는 소리가 아니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처럼 자연과 인간을 동등하게 여기는 연암이 멋져서라면 수필手筆을 모으는 그 마음이 귀할 것이다.
“이건 콩고물이지!”
나의 스승 중문학자 허세욱 교수님이 웃으며 말했다. 수필잡지의 발행인으로 계실 때인데, 가끔 손으로 쓴 원고가 들어오면 스크랩북에 끼우며 좋아하셨다. 손으로 쓴 수필에 저리도 행복해하다니. 수필의 콩고물. 나도 내 손에까지 묻은 콩고물을 만져보고 비벼보았다.
글씨체 안에 작가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그들은 손수 쓴 글씨 안에 자기의 존재를 숨겨두었지만, 나는 그 안에서 순수한 모습을 찾아낸다. 외모와 다른 글씨체도 많았다. 생각보다 호방하거나 작고 소심한 필체도 있었고, 정갈하거나 흩어진 모습도 보였다. 어느 정도 모이면 전시회를 하자고 하셨는데, 결국 영원히 숙제로 남았다. 스승에게 그리 특별난 의미였는데, 소박하게라도 잡지에 한 페이지 정도 실을 걸 하는 후회가 된다.
손이 예술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로 생각하지만, 결국 글은 손으로 쓴다. 혈관을 통해 들어간 감성이 가슴을 통과해 한바탕 용트림을 한 뒤에 예민한 뇌로 들어가 세밀해지고 끝내 정수리의 정점에 닿는다. 그러고는 밤사이에 다시 거꾸로 똑같은 과정을 거쳐 혈관을 통해, 아침이면 우리들의 손가락 끝에 와 있다. 언어가 두 손에 아침 이슬처럼 매달려 있다. 작가들이 글을 써주기를 기다리며…. 글은 손이 쓴다. 누가 뭐래도 피아노도 손이 치고, 서예도 손이 쓰고, 바이올린도 손이 켠다. 예술은 손에서 나온다.
그런데 나는 이제 손으로 쓰는 글을 잘 못 쓴다. 노트북이 편해서이기도 하지만, 갈수록 악력이 약해지고 필체도 좋지 않아서이다. 문학 플랫폼 클럽에서 책의 내용을 필사할 때가 있는데 난감하다. 남들이 써서 내는 글씨체들은 어찌 그리도 아름다운지, 마치 인쇄라도 한 듯하다. 부럽다. 나는 어떨 때는 제법 쓰는데, 어느 날은 엉망진창이다. 그러니 당최 내놓을 수가 없다. 글씨체만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기도 하는데, 남들이 왜 이러느냐고 흉이라도 볼까 봐서 두 손을 뒤로하고 모른 체 하고 서 있다.
글씨가 이랬다저랬다 하는 건 마음이 불안하다는 증거일 수 있고, 항심恒心이 부족하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항심이 부족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손으로 쓰는 수필이 무섭다. 열등감이 바짝 드러난다. 쨍쨍 내리쬐는 햇빛 속에 펼쳐진 한 마리 생선 같다. 그렇게 슬슬 기고 있는데, 한 편에서 얼굴 두꺼운 ‘배짱’이란 놈이 불쑥 튀어나온다.
“걱정하지 마. 내가 구해줄게.”
“어떻게?”
“넌 수필手筆은 못 써도, 수필隨筆은 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