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참 예민한 사람이야”
오늘 아침, 우리 집 양반이 나에게 한 말이다. 섬세하고 예리하다는 긍정의 의미가 아니라, 성질이 까다롭다고 유난스럽다는 뉘앙스가 담긴 말투였다. 왠지 선뜻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딱 잘라 부정하기에도 참 애매했다. 하지만 나의 예민함이 장점이지, 단점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여보세요 내가 예민하니까 미리 살피고 챙겨서, 가래로 막을 일들을 호미로 막아낸 경우가 한두 가지인 줄 아십니까?’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뱉고 싶었지만, 오늘도 역시 꿀떡 삼키고 말았다.
어느 모임에서 대화의 본질에서 조금 벗어난 엉뚱한 말을 던진 적이 있다. 식사를 하며 담소가 무르익을 때쯤, 어느 분이 “나이가 드니 음식 만들기가 세상에서 제일 귀찮아.” 라고 하셨다.
속으로 ‘음식 만드는 일은 참 즐거운 일인데’ 하고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저는요 TV에서 요리 프로가 나오면 화면 속 그 음식 냄새가 코에 맡아지고 꼭 내가 직접 먹는 것 같아요.”
그러자 맞은편에 앉은 또 한 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받아주었다.
“어머나 그런 TV 어디서 팔아요? 나도 한 대 사고 싶네요.”
센스 있는 말에 좌중이 폭소를 터뜨렸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 ‘내가 정말 좀 이상하고 유별스러운 사람인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저자 마르셀 프루스트는 역시 성격이 아주 예민했던 사람으로 알려졌다. 젊은 시절 평론과 번역, 단편 소설 등을 썼으나 크게 주목받지 못했고, 서른 후반에 파리의 아파트에 틀어박혀 외부와 단절된 삶을 살았다. 빛과 소음에 예민해 방 벽에 코르크를 붙여 소음을 차단하고, 낮에는 두꺼운 커튼을 친 채 잠을 자고 밤에만 촛불을 켜고 글을 썼다고 한다.
그는 어느 추운 겨울날, 어머니가 건네준 따뜻한 홍차에 마들렌 과자 조각을 적셔 입에 넣는 순간,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유년 시절 고향에서의 기억을 마술처럼 생생하게 길러냈다. 사랑했던 사람들도 사라지지만 ‘잃어버린 시간’, 감각을 통해 되살아난 기억을 예술(글)로 기록할 때 비로소 그 시간은 영원해진다(찾은 시간)는 대하소설이 무려 7권이나 된다.
우리도 자라면서 홍차도 많이 마셨고, 조개 모양의 마들렌 쿠키도, 자주 먹었다. 프루스트는 홍차에 적신 마들렌 쿠키의 향기에 의해 의도하지 않은 기억이 부활해 대하소설을 쓸 수 있는 마중물이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글지글 갈비 굽는 냄새부터 산나물 무치는 향긋한 냄새까지 화면 넘어서도 맡을 수 있는데, 과연 나는 몇 권의 책을 쓸 수 있는 걸까. 우스갯소리이지만 글을 향한 나의 열망만은 누구 못지않게 뜨겁다는 뜻이다.
타인의 시선에는 그저 까다롭게 보여 가까이하기엔 먼 당신으로 비칠지 모르지만, 나는 예민한 덕분에 남들이 보지 못하는 삶의 숨은 결을 읽고, 코끝을 스치는 수많은 향기를 모아 글을 쓴다.
“그래요, 나 별난 사람 맞습니다.”
누가 또다시 나에게 유별스럽다 말한다면 이제는 속으로 삼키는 대신 소리 내어 시원하게 인정해 버릴 작정이다.
이 예민함이야말로 내 남은 생을 영원한 글로 붙잡아줄, 신이 내게 주신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기 때문이다.
<조옥규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