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의 독서칼럼] 주인 노예 남편 아내

2026-07-09 (목) 12:54:27 한 영 재미수필가협회 회장
2025년 4월 둘째 주(4월 6일~12일)는 미국 전역에서 ‘전국 도서관 주간(National Library Week)’으로 지정되어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었다. 도서관에서 ‘작가와의 만남’ 행사가 있었는데 4월 9일에는 라구나 니겔 커뮤니티 센터에서 한국계 미국인 작가, 우일연(Ilyon Woo)을 위한 모임이 있다는 알림을 받았다. 이미 이 책 『주인 노예 남편 아내』(Master Slave Husband Wife: An Epic Journey from Slavery to Freedom)를 구입해 둔 터라 작가의 사인도 받고 인사도 나누고 싶어 참석했다. 미팅 룸은 일찍부터 모여든 백여 명의 독자들의 열기로 가득했다.

이 책은 2023년에 발표된 논픽션 작품으로, 19세기 미국의 노예였던 부부 엘렌과 윌리엄 크래프트(Ellen & William Craft)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감동적인 탈출기다. 이 책은 2024년 퓰리처상 전기 부문을 수상하였으며, 『뉴욕 타임스』 선정 2023년 10대 도서, 『타임』 선정 100대 필독서 등으로도 꼽혔다.

주인공 엘렌은 백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피부색이 아주 밝았다. 그러나 출생의 한계 때문에 이복 언니가 결혼할 때 하녀로 따라가서 살게 되었다. 남편 윌리엄 역시 어머니와 형제들이 이곳저곳으로 팔려 가 흩어지는 아픔을 겪은 사람이었다. 당시 흑인들은 법적인 결혼마저 허락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깊이 사랑했고 태어날 자식들에게만은 결코 노예의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비교적 자유로운 캐나다로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그들이 택한 탈출의 방법은 기발하면서도 위태로웠다. 피부가 하얀 엘렌이 부유하고 병약한 백인 신사로 변장하고, 남편 윌리엄은 그의 노예로 가장한 것이다. 엘렌은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오른손을 붕대로 감았다. 이 기묘한 변장으로 두 사람은 조지아주 메이컨에서 출발해 필라델피아까지, 기차와 증기선을 갈아타며 무려 1,000마일(약 1,600km)의 위험한 여정을 거쳐 탈출에 성공했다.

책을 읽어 나가면서 비로소 그 제목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사실상 남편과 아내였으나 그 부부 관계는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오히려 가짜 신분인 ‘주인과 노예’로 위장했을 때에야 비로소 사회적으로 용인되었던 것이다. 피 한 방울만 섞여도 유색인으로 분류되던 시대에, 엘렌이 겉보기에 피부가 하얗다는 이유로 노예주의 옷을 입고 남편을 부려야만 자유를 얻을 수 있었던 풍경은 그 자체로 큰 비극이었다.

자유의 땅 북부에 도착한 후에도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프레더릭 더글라스 같은 인물들과 함께 노예제 폐지 운동에 앞장섰으나, 1850년 도망노예법이 제정되면서 다시 체포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영국으로 망명하여 가정을 이루고 뒤늦게 교육도 받았다.

영국에서는 신변의 위협은 줄어들었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흑인 남편과 백인 아내로 오해했고 그러한 편견 어린 시선은 여전히 그들을 힘들게 했다. 그러나 그들은 꺾이지 않고 각자의 역할을 다하며 당당히 삶을 개척해 나갔다. 수년 후, 남북전쟁이 끝나자 부부는 다시 미국 조지아로 돌아와 흑인 교육과 공동체 발전에 남은 삶을 바쳤다. 이들의 용기 있는 삶은 후손에게도 이어져, 엘렌의 고손녀인 페기 트로터 다몬드 프리슬리는 훗날 미국의 유명한 시민권 운동가로 활약하기도 했다.

우일연 작가는 엘렌과 윌리엄 크래프트가 남긴 자서전 『자유를 향한 천 마일의 여정(Running a Thousand Miles for Freedom)』을 바탕으로, 수많은 역사적 단서와 방대한 자료를 추적해 수집함으로써 이들의 삶과 여정을 복원해 냈다. 북 토크에서 작가가 “두 사람의 숨결을 느끼고 싶어 그들이 탈출했던 1,000마일의 여정을 실제로 따라가며 글을 썼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객석에서는 일제히 깊은 감탄의 박수가 나왔다.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이렇게 생생하게 알려 준 작가가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오늘은 어제의 연장선 위에 있다. 그래서 과거를 바르게 아는 일은 오늘 우리가 어디 서 있는지를 깨닫게 해 준다. 억압에 맞선 인간의 존엄성과 사랑의 힘을 증명해 낸 크래프트 부부의 용기에, 그리고 그들의 발자취를 온몸으로 쫓아 기록해 낸 젊은 작가의 열정에 마음 깊이 응원을 보낸다.

<한 영 재미수필가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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