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털로프 캐니언에 대한 성()과 속()의 관점

 

 

                     “빛이 있으라앤털로프 캐니언 (성스러움의 관점)

 

 미국 서부 애리조나주 페이지(Page) 인근의 황량한 사막. 그 메마르고 붉은 모래 위를 걷다 보면 땅이 갈라진 틈이 나온다. 지하로 통하는 좁은 구멍을 깊숙이 들어가면 현실 세계와 단절되고, 곧바로 빛과 곡선의 향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바로 앤텔로프 캐니언(Antelope Canyon)이다. 별천지, 신천지란 관념어가 구체어가 되는 곳이다.

 

 앤텔로프 캐니언은 협곡이라기보다 동굴에 가깝다. 협곡을 이루는 붉은 바위는 약 19천만 년 전, 쥐라기 시대에 형성된 나바호 사암이다. 애리조나의 우기인 몬순 시즌이 되면,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내린 비가 순식간에 불어나 좁은 협곡으로 쇄도한다. 이 강력한 급류는 모래와 자갈을 머금고 소용돌이치며 사암 벽을 강타한다. 수백만 년 동안 반복된 이 과정은 바위의 날카로운 모서리를 매끄럽게 갈아내고, 마치 물결이 굳어버린 듯한 유려한 곡선 무늬를 벽면에 새겨놓았다. 협곡 내부는 복잡하고 미로 같다. 바위의 질감과 곡선은 화려하고 역동적이다.

 이곳이 '지하의 예술'이라 불리는 이유는 시시각각 변하는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 내는 색채의 마법 때이다. 직사광선이 닿지 않는 협곡의 깊은 곳은, 벽에 부딪혀 여러 번 굴절된 반사광만이 도달한다. 이 빛은 붉은 사암을 오렌지색, 복숭아색, 보라색, 짙은 자주색으로 물들인다.

 가이드는 기묘한 바위 모양을 가리키며 곰(Bear), 하트(Heart), 촛불(Candle)이라고 설명해 준다. 하지만 빛의 각도에 따라 그 형태는 끊임없이 변하며, 관찰자의 상상력에 따라 수만 가지의 형상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는 바위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앤텔로프 캐니언(Antelope Canyon)'은 바위와 물과 빛과 바람이 만든 지구의 숨겨진 갤러리라고 한다.

 (이상은 2025 NowTokyo. All rights reserved. 나우 도쿄에서 생성된 정보 분석 자료를 축약하고, 나의 문체로 편집하였음을 밝힌다.)

 

 

 내가 컴퓨터(마이크로소프트 윈도)를 켤 때 배경 화면으로 나오던 사진이 눈앞에 실물로 있는 것이다. 고운 주황색이 손에 물들 것 같아 바위를 만져 보지만, 차가운 촉감이 이 동굴 속 같은 협곡이 꿈의 공간이 아님을 일깨워 준다. 곡선이 하도 부드러워 바위마저 부드러운 줄 알았는데, 그 질감은 딱딱한 돌이다.

 인간이 조각할 수 없는 온갖 곡선들이 사암 벽을 휘감고 있으며, 천장의 좁은 틈으로 쏟아져 내리는 태양 빛은 어두운 협곡 안을 성스럽게 밝혀 준다. 햇빛이 종교적 물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육십 중반에야 확실하게 알았다. 혹시 세계적인 건축가 안디 다다오가 여기를 다녀간 후 힌트(hint)를 얻어, 그 유명한 빛의 교회를 설계한 건 아닐까, 생각했다.

 협곡을 통과한 빛은 조금 전 사막 위에서 맞던 일상의 빛이 아니라, 천상의 빛, 태초의 빛이 되어 있었다. ‘Oh My God’, ‘Oh My God’이 저절로 나왔다.

 당신이 만약 천상의 빛, 태초의 빛과 직면하고 싶다면 좁고 깊은 앤털로프 캐니언으로 들어가 하늘을 우러러보시라. 당신 눈가에 맺히는 이슬을 나는 책임질 수 없다. 빛이 주는 신성함, 거룩함, 절대성을, 불가지론자고 무신론자인 나도 부인할 수가 없었다. 아니 빛이 주는 엄숙함에 압도당해 고해성사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특히 천장의 틈으로 태양 빛이 수직으로 꽂히는 '빛의 기둥(Sunbeam)'을 보는 순간, 알 수 없는 경외심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울게 하소서”, “울게 하소서를 되뇌었다. 오페라도, 헨델도 잘 모르는 내가, 종교적 심성이 남아있다는 게 놀라웠다.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기득권층에 저항하고 힘없고 가난한 자들 편에 서서 싸워준 진보적인 청년 예수를 앙망하며, 그의 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앤털로프 캐니언은 세상의 구상, 비구상 조각품들을 다 갖다 놓은 듯한 거대한 전시장 그 자체다. 온갖 조형물을 보면서, 그 하나하나가 낮은 자 가운데 임하셨던 예수님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뜬금없는 일이다.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임하셔도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기 때문일까. 기독교에 비판적인 내가 왜, 이곳에 와서 시쳇말로 예수에 꽂혔는지 아이러니가 따로 없다.

 

 

                      ‘자유로워라앤털로프 캐니언 (세속적인 관점)

 

 조각가들에겐 어마어마한 상상력과 영감을 줄 장소다. 아니, 예술가들에겐 맘껏 자유로울 대지의 자궁.

 끝없이 현란하다는 점에서 매혹적이고 환상적이지만, 나 같은 범부는 현혹되기 쉽다. 즉 미혹에 빠질 위험성이 크다. 아방궁같이 화려하다. 지나치게 신비롭다. 춤추는 곡선과 빛의 향연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게 한다. 자칫 잘못하면 환각 상태에 빠지기 쉽다. 그렇게 치명적인 현간(玄間)이다.

 

 

 

 참고: 일본의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빛의 교회는 일본 고베 근처에 있는데,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단순한 직사각형 구조를 갖추고 있다. 특히, 교회 중앙에 십자가를 뚫어놓은 작은 틈을 통해 빛이 들어오면서, 공간 전체에 아주 강렬한 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빛의 십자가는 계절, 시간의 궤적에 따라서 움직인다.

 

 

 작품 후기(作品 後期)

 

 멋진 앤털로프 캐니언사진이 휴대전화기 안에 여러 장 있다. 이 사진과 함께 싸이트에, 글을 올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참았다. 사진으로 보여주고 싶은 풍경을 내 필력으로 최대한 표현해야 문학이란 신념에서다. 사진으로 보여주면 이해는 쉽겠지만, 상상력을 국한 시킨다. 문학은 상상력에 관 안 한 무한대로 열려있어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사진이나 영상은 상상력을 제한한다. 그래서 나는 디카시()나 디카 수필을 쓰지 않는다. 시대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는 구닭다리라 해도 괜찮다. 전통을 고수하는 나 같은 보수주의자도 필요하니까.

 

 글을 쓸 때마다 늘 새로워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이번 글도 마찬가지다. 나의 새로운 해석이 들어간 설명과 나의 새로운 감성이 들어간 묘사로 일관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꽤나 힘들었다. 글의 밀도와 긴장감을 최대한 증폭시켜야 한다는 필연성에, 헤어날 길이 없었다. 얼마나 성취됐는지는 모르겠다.

 

 새롭게 해야 한다는 일념의 하나로 제목을 평론식으로 붙여 봤다. 내 많은 글 중 평론식 제목은 처음이다. 이는 일종의 문학 용어로 낯설게 하기. 그럼에도 글 전체를 아우르는 나만의 독창적인 시각이 부족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