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란이 꽃을 열던 날 / 김은숙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나는 칸트가 자주 걷던 네카어강 산책로에 닿았다. 여름 햇살은 폭포수처럼 한순간에 내리꽂혔다. 빛이 지나간 곳마다 청명한 기운이 감돌았다. 초록이 가득한 오솔길에 서자 생각 길이 열리고 머리가 맑아졌다. 이파리에서 시작된 물결이 강물 위로 번졌다. 자연은 서로 스며들며 또 다른 풍경을 만들었다. 고요한 시간, 침묵조차 특별하게 다가왔다.
사유의 중심에서 사방으로 뻗은 길 앞에 섰다. 갈팡질팡한 마음을 다잡지 못한 채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때, 자갈 부딪히는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뒤를 돌아봤지만,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소리는 내 마음을 흔들어 깨웠다. 어느 순간 한 길에 시선이 멈췄다. 동시에, 희미하던 감정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오래전에 들은 어머니 말씀이 불쑥 떠올랐다.
"사람은 서로 기대고 사랑하며 살아야 해."
어릴 때는 별생각 없이 듣고 넘겼는데 그 말이 새삼 가슴을 울렸다. 그건 나를 사색의 길로 이끈 명징한 말이었다. 평소 같으면 망설였을 순간이지만, 그리움과 따뜻함이 버무려진 용기가 발걸음을 이끌었다. 그렇게 한쪽 길을 택했고, 내 안의 흔들림도 천천히 가라앉았다.
산책로에 터를 잡은 바람은 짙은 잎사귀 사이를 누비며 나뭇잎을 춤추게 했다. 초록 물결이 출렁일 때마다 나무 향이 온몸을 깨웠다. 햇살에 물든 작은 먼지까지도 푸른빛으로 반짝였다. 높고 낮은 새 울음이 좁은 산책길에 메아리쳤다. 소리는 사색의 배경음악처럼 자연스럽게 깔렸다. 곤충의 날갯짓에 걸음을 멈추자, 초록 터널 안의 움직임이 하나처럼 조화를 이뤘다. 마음은 한결 차분해졌고, 소리는 일정한 리듬을 만들었다. 오랜만에 자연과 가까이하자, 잊고 있던 감성이 살아났다. 산책로에서 나도 어느새 자연의 한 부분이 되었다.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칸트의 물음이 떠올랐다. 그는 사람 마음속엔 스스로를 비추는 도덕의 별이 있다고 했다. 밤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빛, 마음속에 자리한 도덕의 법칙, 그건 내게 경외심이 뭔지를 일깨워 주곤 했다. 순수함이 빚어내는 소리와 원초적인 감정에 가슴이 뭉클하게 요동쳤다. 비로소 ‘사랑’이 구체성을 띤 형체로 다가왔다.
산책길을 걷다 둥치가 큰 나무 그늘에 멈춰 섰다. 햇살은 나뭇잎 사이로 스며들어 손등 위에 무늬를 남겼다. 빛과 그늘이 교차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내가 걸어온 '상담'의 길을 되짚어 보았다. 그동안 수많은 내담자를 만났고 그들을 통해 내 마음을 헤아릴 때가 많았다. 때로는 상대의 말이 아닌 손끝의 떨림, 숨결의 미세한 변화를 먼저 감지할 때도 있었다. 누군가의 상처를 마주하면, 내 마음도 움직였다. 사랑은 거창하거나 특별한 감정이 아니라, 무심히 쉬는 숨과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사무실 한쪽에 화분 몇 개를 놓아둔 게 몇 년 전이었다. 그중 풍란은 좀처럼 꽃을 틔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꽃대에 봉긋한 게 올라오고 있었다. 감향甘香을 느꼈을 때 순백의 꽃이 톡, 솟아오른 걸 보았다. 그날 오후에 시들어가는 꽃잎 같은 여자가 상담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편두통을 호소했다. 낯빛이 창백했다. 그녀를 두통으로 몰고 간 건 아들의 병이었다. 자기 속에 갇혀버린 아들로 인해 울 수조차 없다는 그녀의 한숨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
그 숨 속에는 그녀의 파리한 날들이 있었다. 나는 목까지 치민 말을 수없이 삼켰다. 의례적인 위로가 그녀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어 귀를 열고 듣는 데 열중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생사의 갈림길에 섰다는 사람에게는 말이 필요할 것 같지 않았다. 유서를 썼다 찢기를 반복했다는 그녀의 손 위로 풍란의 그림자가 겹쳤다. 문득, 그녀와 풍란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틈으로 들어온 바람에 백색의 꽃이 가볍게 흔들렸다. 나는 그녀에게 풍란 화분을 내밀었다.
“이 꽃은 절벽에 뿌리를 내려도 끝내 꽃을 피운답니다.“
어둠을 밀어내고 햇볕 속에 서고자 한 절실함이었을까. 그녀가 화분을 받아안고 가만 웃었다. 그날 나는 상처에 갇힌 사람에게 절실한 게 뭔지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상담실에서 자주 떠올리던 말은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로 대하라’라는 칸트의 사상이었다. 상담실에 있으면 바깥엔 경쾌한 새소리가 흘러도, 실내엔 무거운 공기에 갇힐 때가 가끔 있다. 내담자의 한숨이 방안을 맴돌고, 숨소리가 불규칙하게 이어질 때 나는 중심을 세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한 사람을 온전히 바라보고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에 집중했다.
화분의 식물이 물을 먹고 생기를 되찾는 걸 바라볼 때면, 사랑도 이와 같다고 생각했다. 웅장하거나 극적인 감정이 아니라, 내가 깨닫지 못한 순간에도 스며드는 게 사랑이었다. 누군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숨을 놓지 않고 살아갈 수 있듯, 사랑도 존재의 바탕이 되어 주는 힘이었다. 서로의 온기가 스치는 찰나, 그 경계에 사랑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나무 아래 멈춰 서서 숨을 깊이 들이쉰다. 산책길 옆 자갈 틈새로 스미는 바람이 내 불안을 감싸주는 것 같았다. 자갈 부딪히는 소리, 바람 소리, 물소리, 새들의 지저귐이 하나의 음악처럼 귓가를 맴돈다. 칸트도 이 길을 걸으며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수없이 물었으리라.
햇살이 스며드는 하이델베르크 성을 바라본다.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쌓인 산책길은 고요하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 거친 나무껍질 틈새로 힘겹게 솟아나는 새싹까지, 생명은 보는 이의 마음에 빛이 된다. 내 앞을 흐르는 강물과 내면에서 퍼지는 사랑의 감정이 칸트가 말한 경외심과 겹쳤다.
산책길이 끝나는 곳에서 손을 펼쳐본다. 선명한 손금마다 지나온 세월이 새겨져 있다. 내담자와 손을 맞잡던 순간의 따스함도 겹겹의 주름으로 남았다. 반복되는 자연의 흐름과 불규칙한 내면의 생각 사이를 오가는 감정, 답은 분명했다. 사랑이, 나를 살게 하는 힘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