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수필생각 / 임병식


수년전 나는 주제넘게도 어느 월간문예지 주간의 청탁을 받고 소위 ‘수필쓰기’라는 연재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잡지사의 제의가 왔을 때 의당 사양했어야  옳았으나, 매사를 끊고 맺음이 분명하지 못한 성격대로  미적거린 것이 그만 승낙을 자초하는 꼴이 되어버렸던 것이다.'아이구 이걸 어쩌나 '할 때는 이미 글방이 마련된 후여서 도리없이 없는 실력을 발휘하여 써서 채워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후의 일이다. 그렇게 이십 여회를  썼는데도  성이 차지 않는 것이었다. 특별히 더 할말이 있어서가 아니라 올려놓은 글들이 내 뜻과는 달리 어쩐지 진의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쓰는 이 글은 그에 대한 일종의 해명성 글이라 해도 그리 틀리지 않다. 다시 수필을 생각해 본다. 수필은 대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해서 나는 머뭇거림이 없이 수필은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담아내는 진솔한 문학'이라고 말하겠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수필은 최대의 장애를 안고 있다. 뭔고 하니 소설처럼 꾸며서 극적인 것을 보여줄 수도 없고 끝까지  남의 이야기로만 애둘러 쓰는데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가령, 꾸며 쓰는  소설은  칼을 맞고 죽어 가는 장면이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는 쾌감을 작가의도에 따라 마음대로 그려낼 수 있는데 수필은 그럴수가 없다. 그리고 소재의 선택에 있어서도 어디까지나 쓰는 그사람의 체험내의 것이며, 설령 남의 이야기를 빌어 썼다 하여도 그것은 자기 해석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게 한계일까? 나는 이 물음에 대하여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지레 타성에 젖어 기왕에 구축된 암묵적 룰 속에 안주해 버린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써왔듯이 수필은 그런 식으로 써야하며, 사고의 틀도 거기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우리수필은 순치(馴致)된 틀 속에 철저히 갖혀 있었다. 수필본래의 출발점인 시필의 실험정신이 사라진 채 그냥 대가 몇사람이 써오는데로 전철을 밟아 따라가며 새로운 시도에는 손을 놓아버린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까지 수필을 쓰고 읽으며 수필이 자기의 흥취나 족적을 더듬는 것은 보았으되, 절절한 그 무엇을 전하고 말해주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편지로나 이야기로는 수필감이 떠도는데도, 정작 수필로는  쓰여진 것을 거의 보지 못한 것이다. 여기서 환기의 의미로 그간 읽거나 들은 이야기 중에서 두 가지만 예증(例證)해 보겠다.

 동백꽃의 작가 김유정은 젊은 시절에 폐결핵을 앓아 중태에 빠져서 '구렁이 한 마리만 구해서 고와먹었으면 좋겠다'고 지인에게 편지를 보낸 일이 있다. 그 '아흐' 하고 한숨짓는 소리가 나는 지금도 어느 수필의 명문장보다도 뇌리를 때리는 것을 느낀다. 왜 그런 수필은 없는가. 그리고 또 하나 어느 수필가가 살아생전에 겪었다는 일도 그렇다. 생활형편이 갑자기 곤궁해져서 버스를 타지 않고 몇 정거장씩 걸어다니게 됐는데, 이를 보고 아는 사람들이 '운동을 하느라고 그런 모양이다'라고 생각하더라는 것이다.

본인의 입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이 정도면 내가 느끼기에 최고의 글감이다.  그런데 그 수필가는 평소 뛰어난 필력을 인정받은  사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작품으로 그 이야기는 남겨놓지를 않는 것이다.(혹여  어느 작품 한쪽에 조금 언급 해놓았는지는 모르지만) 드러나면 자기의 인격이 손상된다고 느껴서 그랬을까.
 
내가 그간 읽은 수필 작품 중에서 아직까지 자기를 발가벗겨 수치도 미학으로 승화시킨 감격할(?)작품을 만나지 못했다. 안따까운 일이다.아쉬운대로 조경희선생의 ‘얼굴’이란 작품에서 여성으로서는 썩 하기 어려운 못난 얼굴이야기를 대했고, 박연구선생은 ‘변소고’에서 가난한 소시민의 애환을 보여주었으며,  장백일 선생은 한때 아내가 기원을 운영할 때 아내에게 집적대는 손님의 이야기를 '바둑'이란 수필로 쓰고,  정호경선생이 '낭패기'에서 똥 싼 바지이야기를 진솔하게 써 보여주었지만  탁 죽비로 내려치는 듯한 경이와 감탄을 아직 맛보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그게 소설가가 쓴 작품에서는 그런 글이 있었다. 한편은 소설이고 한편은 수필인데, 그 중 작품 ‘날개’를 자전적 수필로  보아줄 수 있다면(이상은 그런 생활을 한적이 있다.)  창녀인  아내가 분단장을 하고  손님을 받으려나가는   아픔을 지켜보는 화자의 심리적 묘사가 리얼하게 그러져있다. 그리고 다음의 ‘ 글씨 많이 늘었냐’는 이순소설가의 수필작품은  내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본문 일부를  옮기면,'...전략...통 털어 십여 년의 작품생활 경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게 밤새워 고민한 철학의 문제가 없는 까닭이다. 다만 내게 있는 것은 때때로 오셔서 명색이 작가부부인 아들 며느리의 서재를 기웃하시면서"일감은 많으냐?"하고 고매한 작가 업을 내재봉소나 뭐 그런 날품팔이의 일과 같이 취급하시는 시어머니와 요새 원고 쓸게 많아 바쁘다는 며느리에게 "어, 그렇게 많이 쓰면 글씨가 퍽 늘겠구나."라고 이번엔 소설 쓰는 일을 대서방 일로 취급하시는 학력전무의 시아버지가 계실 뿐이다....이하생략'
 
내용인즉, 한글을 모르는 시아버지가 작가가 글을 쓰는데 인사치레 건네는 모습을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어디에서 수필가가,  이렇듯  인격에 입을 손상을 각오하고  솔직한 글을 쓴 사람이 있던가. 왜 소설가는 그 치열성을 보이는데 수필가는 못하는가.

 이쯤하여  글을 따라 읽은 사람들은  눈치를 챘을 줄로 안다. 내가 결국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를.  그렇다면 결론은 자명한 것이다. 독자에게 자랑하고 싶고, 기억해주기를 바라며 글을 쓰기보다는 좀 부끄럽고  뼈아픈 일이라도 그러한 것을 기피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꾸미고 내숭을 떠는 일은 글을 죽이는 첩경이며 사약이다. 그리고 글이 바로 그 사람의 다른 표현이라면 개성도 있어야하고 문장에 감정도 실려 문향도 풍겨야 한다.내가 어쭙잖은 이야기를 쓰고 다시 하고 싶은 말을 거듭 하는 것은 바로 초점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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