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의 선택과 생략 / 유경환

 

1. 체험의 선택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나름의 체험을 귀하게 간직한다. 일상적으로 겪는 온갖 일들 가운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픈, 그래서 특별한 의미가 함축된 일을 따로 저축하게 된다. 경험은 무의식적으로 겪어낼 수 있되, 체험은 반드시 의식이라는 대가를 지불하면서 저축하게 된다. 체험의 선택은 그 자체가 현명한 삶의 선별인 셈이다.

 

   수필이 자기 체험을 소재로 한 일종의 고백이라고 해서 겪은 일들을 모두 나열한다면, 비슷한 일을 이미 겪고 싫증까지 느끼는 독자에겐 거부반응을 사게 될 것이다. 체험은 소재로서의 요소이긴 하되, 선별된 체험만이 의미를 얻어 독자를 설득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살아가는 삶의 표정을 세세하게 모두 기록할 필요도 없으며, 그것들에게 억지로 의미를 부여할 이유도 없다. 어린이가 그려낸 아동화와 이름난 화가들이 그려낸 미술작품을 배비한다면, 같은 대상을 놓고 그렸다 해도 그림에 옮겨진 선택에 뚜렷한 차별이 있다. 아동화에선 눈썹이 몇 개인지까지 셀 수 있도록 그려지는 데 반해, 미술작품인 초상화에선 굵은 한 줄로 그어지거나 생략되기 일쑤다.


   만약 같은 곳엘 다녀와서 다녀온 사실을 소재로 수필을 썼다고 한다면 다녀온 사건은 체험이 되는데, 이 체험을 얼마나 소화하고 어떻게 해석하며 무엇에 비유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글 쓰는 사람에 달린 과제가 도니다. 그런 글에 담기는 내용은 그에게 축적되어 있는 내적 자본, 곧 역량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므로 체험의 요리사는 지식의 양과 독서량 그리고 지성과 인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남보다 많은 독서량과 남보다 깊은 사유 그리고 남보다 풍부한 고민으로 빚어지는 것이 개인 역량이다. 체험은 자산이지만, 체험의 운용은 능력의 문제이다. 능력이란 지성과 인격의 결합인 역량의 다른 표현이다.

 

   삶의 표정을 모두 쓸 필요도, 억지로 의미를 부여할 이유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소소한 일상일지라도 그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이유가 있다면 마땅히 소재로 선택할 만하다. 이 체험의 선택이란 것은 각자의 판단기준과 판단능력에 따른 문제가 된다.

 

   체험, 이것에서 쓸 만한 체험만 간추려내는 체는,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는 의식의 체이다. 이 체의 크기와 깊이는 지성과 인격으로 정해지는 것일 뿐, 필치라는 기교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눈으로 실체를 보고 마음으로 본질을 본다. 실체와 본질을 함께 보아야, 겉과 속을 아울러 보아야 편견이나 무지 또는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야 마음의 자유로움을 만날 수 있고, 이런 자유로움에서만 체험의 선택이 쉬워진다. 사색하는 눈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2. 체험의 생략

   수필은 산문이므로 운문에서처럼 극도의 생략은 요구되지 않는다. 하지만 수필에서도 체험의 재생이나 상기(想起)에서, 적절한 절제를 요하는 것이 사실이다.

   사람은 때때로 단지 넉 자의 글자를 놓고도 그 뜻을 40자나 4백 자로 확대해석하는 능력을 발휘하는데, 수필 읽기에서도 이를 곧잘 원용하고 있다. 수필을 문학작품으로 읽는 사람이라면, 그 내면에 상당한 수준에 이른 동질의 체험이나 유사한 내용의 체험을 이미 지니고 있음직하다.

 

  독자 나름의 상상이나 연상을 위해 여백을 남겨가며 쓸수록, 작품의 매력은 커지고 글은 담백해진다. 이런 여백을 남기지 않는 글 ‘-’곧 설명이 장황한 글은 읽어도 정서의 갈증을 계속 느끼게 한다. 독자가 내면에 지니고 있는 체험을 이끌어내지 못하여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글이 되고 만다.

글을 쓰는 사람은 흔히 자기 체험을 완벽하게 전달하려고 애쓴다. 완벽한 전달을 위해 생략해야 할 것을 생략하지 못하고 구차스레 놔둔다. 또한 필요 이상의 형용사, 부사를 구사한다. 이런 경우 독자는 형용사, 부사에 끌려다니게 되므로 줄거리를 놓치거나 주제에서 이탈하여 작품의 본질에서 멀어지게 되기 쉽다. 형용사, 부사는 글의 초점을 흐리게 하거나 혼미로 유도하므로, 생략되어야 할 우선대상이다.

 

   체험 내용과 필자의 인격까지 그대로 드러나는 수필에서는, 체험의 수준과 인격의 준거가 되는 것이 별 수 없이 문장 그 자체이다. 동원하는 단어와 단어들의 조합이며, 구사하는 단어와 단어들의 배령이 바로 문장일 수밖에 없다. 글을 쓴 사람의 정서가 고스란히 글에 전이되는 것은, 단어들이 정서논리를 구상하기 때문이다.

 

   서툰 사진사는 피사체의 전경을 빠짐없이 담아내려고 욕심을 부린다. 하지만 전문가인 사진작가는 강조하고픈 대상에 초점을 맞춰서 사진을 찍는다. 그 외의 피사체는 흐린 영상으로 담아낸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담아내지 않고, 선별적으로 초점을 맞춰서 찍어내는 영상의 아름다움, 이런 생략과 초점두기 ‘-’, 집중 조명의 기법은 수필쓰기에서도 그대로 필수 요건이다. 수필에의 생략도 이와 똑같다. 선택도 역량의 문제이고, 생략도 역량의 문제이다.

 

   생각이 미처 덜 여문 사람은 자신의 성숙도나 사유의 깊이를 재는 일은 미뤄놓고 미문을 쓰려는 욕심으로 미사여구를 빌어다 쓰거나, 화려한 문체를 위해 수사력을 발휘하려고 고집하거나, 또는 외국어 문체처럼 써서 신선한 충격을 기대하는 음모를 깔아놓기 일쑤다.

 

   수필에서는 글이 곧 사람이므로, 그런 수사나 시도가 오히려 그 사람을 천박하게 만들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진실한 말은 아름답지 않다. 아름다운 말은 진실을 전달하는 데 적합하지 못하다.

 

3. 말을 끝내며

   나 역시도 체험의 생략에 과감하지 못하여 늘 고민한다. 그 대신 원고지에 옮겨 쓰는 과정에서 퇴고를 거듭한다. 한 편의 글을 마치기 위하여 거의 네댓 번씩 베껴 쓰고 지우고 잘라내고 있다. ‘내 뜻을 충분히 이해하여 줄까?’를 걱정하며 설명을 늘어놓던 시절도 있었고, 남의 글에 밑줄을 그어놓았다가 꾸어다 쓴 적도 있었다. 이런 버릇이 글과 사람을 너절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데 30년이 더 걸렸으니 어찌 아둔한 사람이라 아니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