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우뚱한 균형 / 강병기 

어린 시절 나는 어딘가에 숨는 것을 좋아했다. 처음에는 이불장이라든지 옷장 속에 숨곤 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시들해졌다. 답답하고 무료해서 그랬을까. 어둠이 주는 음습함 때문이었을까. 아니, 어쩌면 숨어 지내는 나를 아무도 찾지 않아서 그만두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아주 새로운 공간을 개발했다. 부엌 마루 밑 장작더미 사이였다. 그곳에는 장작더미 사이로 미로가 적당히 형성되어 있었다. 그곳에 전구를 끌어다가 걸어두고 집에 있는 쌀가마니를 바닥에 깔았다. 이렇게 하여 나는 최초로 나만의 방을 만들었다. 그곳은 내 비밀의 아지트였다. 그곳에서 강아지를 끌어다가 같이 놀기도 했고, 만화나 동화책을 가져다 읽기도 했고, 그러다 잠이 들기도 했다. 배가 고프면 식은 밥을 꺼내 먹었고 심심하면 노래도 불렀다. 그때 내가 즐겨 불렀던 노래는 <섬 집 아기>였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하지만 그 놀이도 그리 오래 가진 않았다. 이후 어느 때쯤인가, 옆집 상곤이네 평상 아래에서 놀기 시작했다. 그곳은 소주 상자나 정종 상자로 받침대를 세우고 그 위에 합판을 덮은 곳이었다. 놀이를 할 수 있는 날이 그다지 많진 않았지만, 아직도 내 가슴 한편에는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나는 왜 그런 곳에 숨어들기를 즐겼을까? 어린 내가 외로움을 탔는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곳이 아늑했고, 나만의 공간으로 어떤 만족감을 느꼈었다. 특히 상곤이네 평상 아래에서의 기억은 아직도 삼삼하다. 상곤이. 그는 나보다 두어 살 어렸는데 뇌성마비였다. 태어날 때 감자로 머리를 누른 탓에 그리된 것이라고 했다. 감자를 잡은 사람이 의사인지, 간호사인지, 아니면 동네 산파였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내가 처음 그를 본 게 몇 살쯤이었는지도 모르겠는데, 방안에 누운 채 목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고 사지가 뒤틀린 그의 모습을 처음 본 순간, 나는 흠칫 물러섰다. 무섭고 징그러웠다. 그는 내가 아는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와 가까워졌는지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나는 그를 무척 좋아했다. 내 또래 아이들은 내가 그런 그와 노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니는 우째 그런 아이랑 노노?”

“와, 상곤이가 어때서?”

나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상곤이가 어때서?’라는 말의 뜻을 그때의 내가 과연 이해하기나 했을까. 처음에 그와 나는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그는 새장에 갇힌 카나리아처럼 소리를 내며 몸을 비비 꼬았는데 나는 그 지저귐을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의 엄마와 아버지가 그를 보듬어 안고 변소에 다니는 것을 몇 차례 본 후에 그가 오줌이나 똥이 마려울 때 어떤 소리를 내며 어떤 몸짓을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가늠했다. 언제부터 그가 몸을 뒤틀며 괴이한 소리를 내지르면 나는 소리쳤다. 아줌마, 상곤이 오줌 눈 답니 더, 혹은 상곤이 똥 마렵다네요. 상곤이 엄마는 물론 동네 어른들까지 그런 나를 기특하게 여겼다. 나는 새소리 같은 그의 말을 조금씩 알아채면서 그의 동작이나 눈빛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들끼리는 말로 하면 그만이다. 구태여 상대의 움직임이나 눈빛까지 주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말을 하지 못하고 짐승처럼 소리만 지를 줄 아는 상곤이는 온몸이 언어의 도구였다. 나는 그의 눈을 들여다봤고 그 애도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우리는 눈빛으로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를 필요로 하는 그 애가 내겐 누구보다 소중했다. 그는 내 친구였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그의 부모님은 그를 안아다 평상에 뉘었다. 나는 그와 장난을 치면서 예의 그 평상 아래에 숨곤 했다. 그는 내가 평상 아래에 숨었다가 나타나는 것을 참 좋아했다. 나는 평상 아래에 숨어서 상곤이가 몸을 뒤틀거나 으, 으으, 나를 부르는 소릴 듣는 것을 좋아했고, 오가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와 얘기 소리를 듣는 것도 좋아했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요양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은 거의 태반이 중풍과 치매를 앓고 있다. 그러므로 의사인 내 입장에선 어떤 환자에게 특별히 관심을 갖는 경우는 드물다. 성격이 까다로워 다루기 힘든 경우의 환자나, 증상이 심했는데 뜻밖의 호전반응을 보인 환자를 기억하는 정도다.

신 여사라는 여자 환자가 있다. 그녀는 중풍으로 한쪽 팔다리를 전혀 쓰지 못한다. 틀니 빠진 입을 벌리기만 하는 정도라서 딱 필요한 만큼의 소통만 가능한 상태다. 그런데도 자기 증상에 대해서 별다르게 우울해하거나 낙담하는 기미는 없다. 다만 눈을 감은 채 지나치게 조용했다. 중풍이란 한의학에서 풍 즉 바람에 맞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풍이란 개념은 수많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세찬 바람이 나뭇가지와 잎을 부러뜨리고 떨어뜨리는 것처럼, 신경 혈관과 관절질환으로 인해서 운동성의 장애가 생기는 것을 말한다. 이 질환은 일차적으로 신체장애가 나타나지만, 그 장애로 인한 정신적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할 경우가 더 큰 문제다. 의식의 변화가 나쁜 쪽으로 기울어 생에 대한 의욕을 잃거나 우울증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그녀는 하도 조용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찌 보면 의연하게 견디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자포자기한 것도 같았지만 어쨌든 나는 그녀가 별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으므로 그저 여느 환자처럼 평범하게 대했다.

어느 날 뇌경색과 뇌출혈로 인해 내 한쪽 팔다리에 마비가 왔다. 발가락 하나를 움직이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미동도 하지 않는 내 발가락은 땅속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바위와도 같았다. 마음으로라도 움직이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마음이 가면 기가 가고 기가 감으로써 혈이 가고 마침내 움직일 것이라는 한의학적 진실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아니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용을 썼다. 하지만 내 몸은 그게 말이나 되느냐고 비웃듯 일절 반응하지 않았다. 게다가 통풍까지 생겼다. 통풍의 증상은 바람만 불어도 아프다는데, 내 마음을 움직일 때마다 그것조차 바람이 되어 통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발이 붓고 발가락과 발목만이 아픈 것이 아니라 경련까지 일어나 강직 증상이 심했다. 강직 증상 때문에 경련이 일어났는지도 모르지만 바람처럼 뭔가가 발에서 일어나는 느낌이 생기면 바로 통증이 있는 곳에서 경련이 일어나고 그 경련은 발이 무릎까지 가서 붙어버릴 듯 치달아 오르고 나서야 겨우 주저앉았다. 심할 때는 일분에 대여섯 차례 이상의 경련이 반복되었다. 그런 증상이 이틀이고 사흘이고 멈추지 않았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중풍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놈의 통증과 경련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놈의 통증은 환자에게 치료될 것이라고 희망적인 말을 해왔던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집요했다.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오죽하면 몸은 못 써도 괜찮으니 제발 이 통증만 사라져 줬으면 하는 꿈까지 꾸었을까.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나는 발가락을 움직이는 것부터 연습하기 시작했다. 2주일이 지나서야 겨우 보행기에 지탱해 걸음을 옮길 수가 있었다.

나는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몸을 보행기에 의지한 채 기우뚱기우뚱 겨우 발걸음을 옮기면서 회진을 돌았다. 2주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내가 그 꼴로 나타나면 환자들이 어떻게 생각할까가 가장 걱정스러웠다. 제 몸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주제에 누굴 치료해? 수군댈 것만 같은 생각이 내 마음속을 가득 메우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병실로 들어서자 늘 눈을 감고 있던 그녀가 눈을 반짝, 떴다. 눈만 반짝이는 것이 아니었다. 두 손을 들고 고갯짓까지 하면서 나를 반겼다. 그로부터 매일 회진 때마다 그녀는 나를 반긴다. 피로한 듯 지친 듯 눈을 감고 있다가도 내가 들어서는 기척에 눈까풀이 활짝 열린다. 마치 내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무슨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느냐는 듯, 나를 반겨주는 것이다. 나도 웃으면서 한쪽 손으로 답례한다. 상곤이처럼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그녀가 나를 가장 따뜻하게 반겨주는 것이었다. 어디에선가 날아온 꽃씨가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는 것처럼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그녀가 마치 작은 기적처럼 내게 다가온 것이다.

상곤이도 그랬을까? 여태 나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지 못했던 상곤이에게 내가 먼저 다가갔다고만 생각해왔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던 것 같다. 상곤이는 어렸지만 혼자 방 안에서 지내면서 그때 이미 어떤 부분의 감각이 유독 발달하여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 예민한 감각으로, 혼자 숨어 지내는 것을 즐기는 내 병을 알아본 게 분명하다. 상곤이가 먼저 내게 소통의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50여 년이 지난 이제야 비로소 나는 그와의 만남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오늘도 그녀를 만나러 갔다. 여전히 그녀는 나를 반겼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자녀가 몇이냐고. 그녀는 대답했다. 아들이 넷이고 딸이 하나라고.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이제 나는 그녀와 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들이나 딸이 엄마를 찾아오느냐고 나는 다시 물었다. 그녀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리곤 내 손을 잡고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나, 행복해! 그녀의 손이 참 따뜻했다. 눈도 참 맑았다. 구름 틈새로 비치는 달빛처럼, 물결에 부딪혀 반짝거리는 햇빛처럼 그녀의 눈빛은 싱그러웠다. 그 빛이 내 안에 스며드는 것도 같았다. 나는 그녀의 속을 다 알지는 못한다. 그저 짐작만 할 뿐. 그녀의 삶이 오랜 세월 동안 저 눈을 어떻게 물들여 왔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녀의 눈 속에서 그녀의 저 깊고 깊은 속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샘물을 느낄 수 있었다. 돌아서 나오려는 나에게 그녀가 다른 때보다 더 유난히 손을 오래 흔들어 주었다.

나에게 행복은 과연 무엇일까? 아니 지금의 나에게 행복이라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 복도로 나서자 블라인드 틈새로 햇살이 들이친다. 나는 빛과 그림자를 밟으며 기우뚱기우뚱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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