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날 때마다 섬에 관한 책을 찾아 읽는다. 시(詩) 한 구절을 찾았다. 안도현 시인의 '바닷가 우체국'이다. 시인은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라고 말한다. 죽인다!
개브리얼 제빈이라는 젊은 미국 작가의 '섬에 있는 서점'이란 소설도 읽었다. '책방이 없는 동네는 동네라고 할 수 없지!'라든가,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기 위해 책을 읽는다'와 같은 문장들이 아주 인상적이다. 이런 글을 마주치면 몹시 설렌다. 단언적이기 때문이다. 시나 소설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바로 이 같은 단정적 표현들 때문이다. 삶의 무게에 주눅 든 개인들은 감히 할 수 없는 통찰적 선언들을 작가들은 앞뒤 안 가리고 과감하게 내던진다.
문학과 예술이 '단언적'이라면 학문(Wissenschaft)은 '담론적(discursive)'이다. 합리성에 근거한 논리적 설득이 학문적 정당성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담론적 특징을 갖는 근대 학문은 '편지공화국(Republic of Letters)'에서 출발한다. 몇 년 전부터 미국의 스탠퍼드 대학에서는 '편지공화국 지형도(Mapping the Republic of Letters)'라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17, 18세기 유럽 지식인들이 어떻게 지식을 공유해왔는가를 '편지 교신'의 흔적을 추적하여 파악하려는 프로젝트다. 당시의 지식 전파 경로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때,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편지 공화국'은 실재하는 국가였다. 물론 국경은 없었다. 국경을 초월한 지식인 공동체였던 '편지 공화국'은 오로지 '편지'로만 존재했다. 편지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공유하며 합리적이고 보편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근거에 관해 토론했다. 독일의 철학자 하버마스는 이 '편지 공화국'의 개방적 담론 구조야말로 오늘날의 시민사회를 가능케 한 '공공성(Öffentlichkeit)'의 기원이 된다고 주장한다.
'관찰'과 '실험'이라는 근대적 무기로 무장하고, 담론적 구조로 체계화된 '편지 공화국'은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과 같은 고대인들과 투쟁했다. 과감한 '고대인들과의 투쟁'을 통해 '과학과 기술의 통합'이 이뤄졌고, 그 결과 '유용한 지식(useful knowledge)'이 생산되었다. '증기기관'은 바로 이 '유용한 지식'이 만들어낸 하나의 결과물일 뿐이다. 증기기관이 산업혁명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산업혁명'의 본질은 '과학과 기술의 통합'이라는 '지식 혁명'에 있다. '산업혁명'으로 시작되었다는 서양 주도의 근대, 즉 '대분기(great divergence)'는 바로 이 같은 '지식 혁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4차 산업혁명'이 순 엉터리 개념이라는 거다.
'산업혁명'이란 개념 자체가 '헛방'인데 어찌 오늘날의 이 엄청난 변화를 '4차 산업혁명'이란 낡은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느냐는 이야기다. 일단 '4차'라는 숫자부터 헷갈린다. 1차 산업혁명은 '증기기관' 때문인 것으로 다 아는 듯하지만, 그다음 2차, 3차, 4차의 내용이 어떻게 되는지 전혀 분명하지 않다. 왜 매번 '혁명'인지도 참 애매하다.
시대착오적인 '4차 산업혁명'이란 개념을 들고 나온 이는 스위스 다보스포럼의 클라우스 슈바프다. 1970년대 그는 국가들의 경쟁력 순위를 매기는 '세계 경쟁력 보고서'를 출간하여 큰 관심을 끌었다. 국가의 '순위'를 모른 척할 나라는 없기 때문이다.
그 후 그는 '다보스포럼'을 창설하여 또다시 큰 재미를 봤다. '다보스포럼'은 세계 각국의 전·현직 대통령을 포함한 유명 정치인과 경제 장관, 교수, 언론인들이 매년 스위스의 시골 휴양지 다보스에서 모이는 최고급 사교 클럽이다. 포럼의 명성에 비해 내용은 전혀 창의적이지 않다는 비난에 직면하여 슈바프가 급조한 개념이 바로 이 '4차 산업혁명'이다.
'4차 산업혁명'은 독일에서 이미 존재하던 '인더스트리 4.0'이란 개념을 차용한 것에 불과하다. 디지털화하지 않고는 그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독일 제조업의 구조를 '인더스트리 4.0'이란 개념으로 혁신해보자는 거였다. 이 '구호'를 슈바프는 학술적 용어처럼 들리는 '4차 산업혁명'으로 슬쩍 바꿔치기 했다. 이따위 얼치기 용어를 한국 사회는 마치 엄청난 사회 변혁을 예고하는 학문적 용어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산업 사회의 종말을 고하는 초연결, 초지능 사회를 아주 낡은 산업 사회적 개념으로 설명한다는 이야기다. '담론적'이어야 할 학문적 개념을 '단언'하는 사회는 아주 '후진 사회'다.
사회는 '담론적'이어야 하고 삶은 '단언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불안하지 않다. 자꾸 '담론적'이 되어 흔들리는 섬에서의 내 미래를 안도현 시인의 시 '바닷가 우체국'을 다시 꺼내 읽으며 위로한다. 시는 이렇게 끝난다.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바다를 건너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 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 나도 시인처럼 바닷가에서 그림을 그리며 '천천히 늙어가리라'고 아주 '단언적'으로 결심한다. 어쩌다가 등 뒤로 젊은 여인들이 '어머, 화가다!' 하며 지나가도, '제 화실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 하실까요?' 같은 허접한 수작은 절대 안 할 거다. 전혀 못 들은 척, 아주 우아하게 그림만 그릴 거다. 섬에서 나는 그렇게 '단언적인 삶'을 아주 오래오래 살 거다! 어쩌면 아예 안 죽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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