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성격
이정림
"글은 곧 사람이다"(뷔퐁, 프랑스의 박물학자, 계몽사상가)라는 말이 있다. 또 "그 사람과 그 사람이 쓴 글은 똑같다"(루이제 린저, 독일의 소설가)라는 말도 있다. 이 인용문들은 모두 작가와 글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음을 뜻한다. 글 속에 담긴 주제와 그것을 표현해 내는 문장, 그것은 곧 작가 자신의 사상과 철학이요 인격과 품위의 구현물(具現物)이기 때문이다.
수필은 특히 허구의 문학이 아닌 만큼, 어느 장르보다 작가의 개성이 글 속에 그대로 투영되게 마련이다. 개성의 다양함은 작품의 성격을 다양하게 하고, 그 다양성은 수필 형식의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수필의 성격을 크게 둘로 나눈다면, 경수필(輕隨筆)과 중수필(重隨筆)로 나눌 수 있다. 경수필은 작가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주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반면에, 중수필은 작가의 체험을 배제한 객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이 그 큰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 경수필(輕隨筆)
①서정 수필
작가의 개인적 신변에서 정서를 추출해 내는 수필로서, 문장은 부드럽고 표현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표현이란 분식(粉飾)에 치중하는 미문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신선한 의식 속에서 찾아낸 독창적인 표현을 말한다. 서정 수필에서는 시적(詩的)인 상징과 비유도 차용하나 지나치면 산문에서 멀어진다. 시적인 수사(修辭)는 수필을 문예화시키는 중요한 요소가 되지만, 어디까지나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안 된다. 주제는 서정 속에 용해되어 드러나지 않는 경향이 있으나, 주제가 없는 서정은 미문이나 감상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서정의 과잉은 유치한 미감으로서 경계해야 하고, 서정 수필일수록 문장은 담담해야 한다.
<예문>
찰 밥
尹五榮
찰밥을 싸서 손에 들고 새벽에 문을 나선다. 오늘 친구들과 소풍을 가기로 약속을 하고 점심 준비로 찰밥을 마련한 것이다.
내가 소학교 때 원족을 가게 되면 여러 아이들은 과자, 과실, 사이다 등 여러 가지 먹을 것을 견대에 뿌듯하게 넣어서 어깨에 둘러메고 모여들었지만, 나는 항상 그렇지가 못했다. 견대조차 만들지 못하고 찰밥을 책보에 싸서 어깨에 둘러메고 따라가야 했다. 어머니는 새벽같이 숯불을 피워가며 찰밥을 지어 싸주시고 과자나 사과 하나 못 사주는 것을 몹시 안타까워하셨다. 어머니는 가난한 살림에 다른 여축은 못해도, 내 원족 때를 생각하고 고사 쌀에서 찹쌀을 떠 두시는 것은 잊지 아 니하셨다. 나는 이 어머니의 애틋한 심정을 아는 까닭에, 과자나 사과 같은 것은 아예 넘겨다보지도 아니했고, 오직 어머니의 정성어린 찰밥이 소중했었다. 이것을 메고 문을 나설 때 장래에 대한 자부와 남다른 야망에 부풀어, 새벽 하늘을 우러러보며 씩씩하게 걸었다. 말하자면 이 어머니의 애정의 선물이 어린 나에게 커다 란 격려와 힘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소풍 혹은 등산을 하려면 으레 찰밥을 마련하는 것이 한 전례가 되고 습성이 된 셈이다.
오늘도 친구들과 야유를 약속한 까닭에 예와 같이 이 찰밥을 싸서 손에 들고 나선 것이다. 밥을 들고 퇴를 내려서며 문득 부엌문 쪽을 둘러봤다. 새벽에 숯불을 피우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르다가는 안개처럼 사라져버린다. 슬픈 일이다. 손에 밥은 들려 있건만 그 어머니가 없다.
어머니는 새벽녘에 손수 숯불을 불어가며 찰밥을 싸주고 기대하며 기르시던 그 아들에게서 과연 무엇을 얻으셨던가? 그는 매일매일 그래도 당신 아들만이 무엇인 가 남다른 출세를 하리라고 믿고 그의 구차한 여생을 한 줄기 희망으로 살아왔건만 그의 아들은 좀체로 출세하지 않았다. 스스로 고난의 길을 걷고만 있지 아니했 던가. 어머니는 운명하시는 순간에도 그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 먼 길을 떠나던 그 순간에도 아들에 대한 희망을 놓치지 않고 웃음을 보이려 했다. "나는 너의 성 공하는 것을 못 보고 가지만 너는 이담에 꼭 크게 성공해야 한다." 그는 무엇을 성공이라고 생각했는지 나는 모른다. 생각하면 슬픈 일이다. 끝끝내 아들의 성공을 믿으려던 그. 그 아들도 그때는 막연하게나마 감격에 어린 눈으로 대답했었다. 사실 그는 야망에 차 있던 청년이기도 했다. 환상에 사로잡히어 멍하니 섰던 나는 갑자기 시계를 들여다본다. 아침 여섯 시 반, 일곱 시 사십 분까지 불광동 종점으로 모이기로 된 약속이다. 여명의 하늘은 훤히 밝아오고 서글서글한 바람이 옷깃 으로 기어든다. 나는 문을 나서며 먼 하늘을 한번 바라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백수(白首) 오십에 성취한 바 없이 열한 살 때 메고 가던 그 밥을 손에 들고 소년 시 대의 기분으로 문을 나서는 사나이.
어머니! 야망에 찼던 어머니의 아들은 이제 찰밥을 안고 흰 터럭을 바람에 날리며, 손등으로 굵은 눈물을 닦습니다.
②철학 수필
서정 수필이 주정(主情) 수필이라면 철학 수필은 주지(主知) 수필이다. 감정보다는 지성이 주가 되는 수필이고, 정서의 아름다움에 탐닉하기보다 주제의 철학성을 더 중시하는 수필이다. 서정 수필이 정서의 아름다움에 비중을 두는 섬세한 글이라면, 철학 수필은 사유(思惟)의 깊이에 더 비중을 두는 무게 있는 글이다. 사유는 철학을 바탕으로 하며, 철학은 문학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철학을 문예화했을 때, 비로소 철학 수필은 생겨나는 것이다. 주제는 지나치게 강조하려기보다 생각의 여운을 던져 주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좋다. 여운은 때로 명료한 결론보다 사유의 파장이 길기 때문이다. 독자를 가르치려 하지 말고, 깨닫게 해주는 것이 좋은 수법이다.
<예문>
이끼의 연륜(年輪)
趙演鉉
뒷마당에 끼여 있는 이끼로 유명한 일본의 어느 절을 구경한 일이 있다. 그 절은 이끼로 인해서 중요한 관광 대상이 되어 있었다. 5·60평 되는 뒷마당이 비단을 깔아 놓은 것과 같은 아름다운 이끼로 덮여 있는 모습은 참 황홀했다. 그 이후부터 나는 이끼를 좋아하게 되었다.
화분이나 수반에 이끼를 깔아 놓으면 그 속의 화초(花草)가 훨씬 더 생생한 인상을 줄 뿐만 아니라 이끼 그 자체가 독특한 미감(美感)을 자아내 주기도 한다. 그러 나 그렇게 인위적(人爲的)으로 옮겨다 붙인 이끼의 생명은 길지 않다. 아무리 열심히 물을 주고, 그늘에 놓아 두어도 이끼가 자랐던 산 속의 환경과는 달라 그런지 곧 시들고 만다.
이끼가 자라는 데에는 적당한 습기와 그늘이 필요한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습기와 그늘을 아무리 조성(造成)한다 해도 이끼가 생성되는 데에는 일정한 세월이 필요하다. 아무리 이끼가 생성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도 이끼는 별안간에 생겨나지 않는다. 이끼가 생성되는 데에는 오랜 세월이 가장 중요한 여건이 된다.
이끼의 아름다움을 볼 때마다 나는 그 이끼의 연륜(年輪)을 생각하게 된다. 얼마나 많은 세월이 그 이끼를 만들었을까, 그런 것을 생각하면 그 이끼는 더욱 아름 다워 보인다.
아무리 작은 이끼라도 그 이끼가 생성되는 데에는 실로 많은 연륜이 걸린다. 그리고 그 많은 연륜은 조용하고 남 모르는 인내 시간이다. 이 세상의 어떠한 일에 있어서도 이끼가 생성되는 것과 같은 남 모르는 조용한 인내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어느 방면에서이든 일가를 이룬 사람들의 업적 속에는 누구에게나 그와 같은 이끼의 연륜과 같은 인내 세월이 있는 것은 아닐까.
③서사 수필
서사 수필(敍事 隨筆)이란 사실(사건)에 충실한 글로서, 일종의 콩트 같은 성격을 지닌다. 서정 수필과 철학 수필이 자기의 느낌과 사상을 중심으로 한다면, 서사 수필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다. 이 형식은 지문으로 풀어 나가는 수필과는 달리 소설처럼 대화체를 많이 사용함으로써 사건에 실감을 주기도 한다. 또 그 사건을 의미화하고 일반화시키기보다 사건 그 자체를 그냥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데에서 그치는 예가 많다. 서사 수필과 성격이 반대인 글이라 한다면 관념적인 수필이 될 것이다. 관념적인 수필에는 구체적인 예시, 즉 이야기가 없으며, 일인칭인 작가가 서정이나 철학으로만 풀어 나가는 것이 그 특징이다.
<예문>
구 두
桂鎔默
구두 수선을 주었더니 뒤축에다가 어지간히는 큰 징을 한 개씩 박아 놓았다. 보기가 흉해서 빼어 버리라고 하였더니, 그런 징이라야 한동안 신게 되구, 무엇이 어 쩌구 하여 수다를 피는 소리가 듣기 싫어 그대로 신기는 신었으나, 점잖지 못하게 저벅저벅 그 징이 땅바닥에 부딪치는 금속성 소리가 심히 귀맛에 역했다. 더욱이 그것이 시멘트 포도(鋪道)의 딴딴한 바닥에 부딪쳐 낼 때에 그 음향이란 정말 질색이었다. 또그락또그락. 이건 흡사 사람이 아닌 말발굽 소리다.
어느 날 초어스름이었다. 좀 바쁜 일이 있어 창경원 곁 담을 끼고 걸어 내려오느라니까, 앞에서 걸어가던 20 내외의 어떤 한 젊은 여자가 이 이상히 또그락거리는 구두 소리에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으로 슬쩍 고개를 돌려 또그닥 소리의 주인공을 물색하고 나더니, 별안간 걸음이 빨라진다.
그러는 걸 나는 그저 그러는가 보다 하고 내가 걸어야 할 길만 그대로 걷고 있었더니 얼마쯤 가다가 이 여자는 또 한번 힐끗 돌아다본다. 그리고 자기와 나와 거 리가 불과 지척 사이임을 알고는 빨라지는 걸음이 보통이 아니었다.
뛰다 싶은 걸음으로 치맛귀가 웅어하게 내닫는다. 나의 그 또그닥거리는 구두 소리는 분명 자기를 위협하느라고 일부러 그렇게 따악 딱 땅바닥을 박아 내어 걷는 줄로만 아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 여자더러 내 구두 소리는 그건 자연이요, 고의가 아니니 안심하라고 일러 드릴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어서 가야 할 길을 아니 갈 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나는 그 순간 좀더 걸음을 빨리 하여 이 여자를 뒤로 떨어뜨림으로써 공포에의 안심을 주려고 한층 더 걸음에 박차를 가했더니, 그럴 게 아니었다. 도리어 이것이 이 여자로 하여금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내 구두 소리가 또그닥또그닥, 좀더 재여지자 이에 호응하여 또각또각, 굽 높은 뒤축이 어쩔 바를 모르고 걸음과 싸우며 유난히도 몸을 일어 내는 그 분주함이란 있는 마력(馬力)은 다 내보는 동작에 틀림없었다. 그리하여 또그닥또그닥, 또각또각 한참 석양 노을이 내려 비치기 시작하는 인적 드문 포도 위에서 이 두 음향의 속 모르는 싸움은 자못 그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나는 이 여자의 뒤를 거의 다 따랐던 것이다. 2, 3보만 더 내어 디디면 앞으로 나서게 될 그럴 계제였다. 그러나 이 여자 역시 힘을 다하는 걸음이었다. 그 2, 3보라는 것도 그리 용이하게 따라지지 않았다. 한참 내 발부리에도 풍진(風塵)이 일었는데, 거기서 이 여자는 뚫어진 옆 골목으로 살짝 빠져 들어선다. 다행한 일이었다. 한숨이 나간다. 이 여자도 한숨이 나갔을 것이다. 기웃해 보니 기다랗게 내뚫린 골목으로 이 여자는 휭하니 내닫는다. 이 골목 안이 저의 집인지, 혹은 나를 피하느라고 빠져 들어갔는지 그것은 알 바 없으나 나로선 이 여자가 나 를 불량배로 영원히 알고 있을 것임이 서글픈 일이다.
여자는 왜 그리 남자를 믿지 못하는 것일까. 여자를 대하자면 남자는 구두 소리에까지도 세심한 주의를 가져야 점잖다는 우대를 받게 되는 것이라면 이건 여성에 대한 모욕이 아닐까, 생각을 하며 나는 그 다음으로 그 구두 징을 뽑아 버렸거니와 살아가노라면 별한 데다가 다 신경을 써 가며 살아야 되는 것이 사람임을 알았 다.
④사회 수필
사회 수필이란 글 속에 시사성(時事性)을 담는 수필을 말한다. 그러나 그 시사성은 어디까지나 문예적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문예성이 약하면 글은 사회비평적인 컬럼이 되고 만다. 컬럼은 처음부터 문제의 핵심을 파고들지만, 사회 수필은 그 문제를 상징적으로 접근한다. 주제 역시 상징적인 수법으로 처리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주제를 직설적으로 다루게 되면 논설문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사회 수필은 분명하고도 예리한 사회의식을 기초로 한다. 그러나 그것은 보편적인 공감성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그 예리함도 문예적으로 감싸야 한다. 부드러움 속의 날카로움, 촌철살인적인 상징성, 그것은 매우 큰 힘과 울림을 지니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사회 수필의 저력인 것이다.
<예문>
조와(弔蛙)
金敎臣
작년 늦가을 이래로 새로운 기도터가 생겼었다. 층암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가느다란 폭포 밑에 작은 담(潭)을 형성한 곳에 평탄한 반석 하나가 담 속에 솟아나서 한 사람이 꿇어앉아서 기도하기에는 천성(天成)의 성전(聖殿)이다.
이 반석에서 혹은 가늘게 혹은 크게 기구(祈求)하며 또한 찬송하고 보면 전후좌우로 엉금엉금 기어오는 것은 담(潭) 속에서 암색(岩色)에 적응하여 보호색을 이룬 개구리들이다. 산중(山中)에 대변사나 생겼다는 표정으로 신래(新來)의 객(客)에 접근하는 친구 와(蛙) 군(君)들, 때로는 5, 6마리, 때로는 7, 8마리.
늦은 가을도 지나서 담상(潭上)에 엷은 얼음이 붙기 시작함에 따라서 와군들의 기동이 일부일(日復日) 완만하여지다가, 나중에 두꺼운 얼음이 투명을 가리운 후로 는 기도와 찬송의 음파가 저들의 이막(耳膜)에 닿는지 안 닿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렇게 격조(隔阻)하기 무릇 수개월여!
봄비 쏟아지던 날 새벽, 이 바위틈의 빙괴(氷塊)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래간만에 친구 와 군들의 안부를 살피고자 담(潭) 속을 구부려 찾았더니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세 마리 담 꼬리에 부유(浮遊)하고 있지 않은가!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酷寒)에 작은 담수(潭水)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동사 (凍死)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潭底)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다닌다. 아, 전멸(全滅)은 면했나 보다!
(이 글은 1942년 종교지인 《聖書朝鮮》 권두언에 실렸던 수필인데, 이 글로 인해 잡지는 폐간되고 필자는 옥고를 치르게 됨. 이른바 《聖書朝鮮》 필화 사건이 된 이 글에는 매우 함축적인 주제가 숨겨져 있는데, 아무리 일제의 탄압이 심해도 우리 민족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징적인 수법으로 보여주고 있음. 따라서 사회 수필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그 글이 발표된 사회 배경을 먼저 알아야 함.)
⑤ 해학 수필
해학 수필은 유머와 위트를 모두 수용한다. 그러나 유머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므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반면에, 위트는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지적이요 날카롭다. 이런 유머와 위트를 모두 아우르는 해학 수필은, 그러나 쓰기가 만만치 않다. 그것은 사회 수필이 예리한 사회의식을 밑바탕으로 해야 하듯이, 해학 수필은 격(格)이 받쳐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격을 갖추지 못한 해학 수필은 저급한 익살이요 속문(俗文)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기에 해학 수필에서는 더욱 문장의 품위가 요구되는 것이다. 때로는 해학 수필에서 유머가 페이소스를 동반하고, 위트가 풍자(諷刺)를 동반하는 모습을 보기도 하는데, 이것은 모두 해학 수필이 포용하는 다양성일 뿐이다.
<예문>
사깃니
李章圭
어려서 이를 갈 때 어머님은 으레 흔들리는 내 이에 실을 감고 잡아당기셨다.
신통하게도 잘 빠졌던 이, 어머님은 아랫니는 앞마당 지붕 위로, 윗니는 뒷마당 지붕 위로 내던지시면서 내 이가 빨리 그리고 곱게 새로 나길 빌으셨다.
그 간절한 소원도 보람없이 새로 나온 이는 얼마 안 가서 망가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깍두기만 있으면 밥을 먹던 나였지만 어느새 깍두기와는 인연이 멀어지고 말 았다. 그나마 깍두기는 아예 구경도 할 수 없는 외국에 갈 때마다 이는 심통을 부리는 것이었다.
뉴욕에서는 수프로, 모나코에서는 오트밀만으로 삼시 세 끼를 때웠다.
친구인 치과대학장에게 진찰을 받았더니 대뜸 하는 말이
“엉망이군. 학생 실습감으로 십상이다….”
관비(官費) 환자가 된 나는 대여섯 명 학생들에 둘러싸여 치료를 받게 되었다. “아야”를 연발하면서 식은땀을 주르르 흘리고 있는 나를 그들은 마치 사자에 물려 뜯기는 순교자를 보는 로마 사람들처럼 지켜보고 있었다.
치료가 끝나 내 입천장에 철판대기가 하나 끼워지자 올챙이 치과 의사들은 좋은 구경이나 했다는 듯 자리를 뜨면서 “선생님 엄살 대단하신데요.” 하는 것이었다.
월요일 아침에 휘파람을 부는 월급쟁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나의 우울한 월요일은 입천장에 그 철판대기를 끼우는 것으로 시작된다. 토요일이 즐거운 것은 월급 쟁이의 통성, 내 토요일이 즐거운 것은 그 철판대기를 내팽개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였던가, 낚시터에서 그 철판대기가 역겨워 호주머니 속에 뽑아 넣었던 것이 잘못이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 그놈은 다시는 내 입천장에 달라붙질 않았다. 아마 릴 낚싯대를 연거푸 던지는 동안 어딘가가 좀 찌그러졌던 모양이다.
‘차라리 잘 되었구나’ 싶었다. 이 얼마나 시원한 노릇이냐!
별로 웃을 일도 없는 세상, 웃지만 않으면 될 게 아닌가. 보기 흉하다고 아내는 성화였지만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치과에 가는 것은 질색이다. 더더군다나 학생 실습감이 되는 것은 질색이다. 고주파를 쓰기 때문에 조금도 아프지 않다고 치과 의사는 꼬시지만 고주파고 저주파고 간에 뇌수에다 착암기를 들이대는 그 잔인성, 치과의 치료대가 형틀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이가 좋은 것은 오복의 하나라고 했다. 무엇이 오복인지 잘 모르지만 어차피 오 복을 누리긴 이미 틀린 몸, 붉은 입술 흰 이〔丹脣皓齒〕의 미인이 이제 나에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는 두뇌 노동자다.
이런 생각과는 달리 만나는 사람마다 성가시도록 “늙으셨네요” 하는 것이다. 뿐인가, 얼마 전 국제회의에 참석했을 때, 오랜만에 만난 캐나다 친구가 내 얼굴을 한참 살피더니 “치약이 덜 들어 좋겠군….” 하는 것이다.
그것까지는 좋았다. 어느 날 내 수필집을 사 가지고 사인을 청하러 온 한 예쁜 아가씨가 나를 보더니 별안간 울기 시작하는 것이다.
“전, 선생님이 그렇게 이 빠진 분인 줄 몰랐어요!”
치과 의사 C박사는 어지간히 무뚝뚝했다.
“형편없군. 아스완 댐 공사만큼이나 힘들겠는걸….”
아니나다를까, 난공사였다. 자유자재로 그 고주파라는 걸 구사하면서 C박사는 세 시간의 난공사 끝에 내 이를 원숭이 이빨같이 갈아 놓고 말았다. 코끼리 발만한 그의 손이 들락날락하는 바람에 내 입술은 터져 선혈이 낭자하게 흘러내렸다.
예쁜 간호원 아가씨가 꼭 쥐어 주는 그 따뜻한 손길만 없었더라면 아마 틀림없이 기절했을 것이다. 간호원 아가씨의 손길은 실오라기 하나로 내 아픈 이를 뽑아 주 셨던 어머니의 그것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그 날부터 나는 꼬박 사흘을 수프나 오트밀보다 못한 죽물만으로 살았다. 그것이 또 탈이었던지 심한 변비에 걸려 출산에 비길 만한 고역을 치르기도 했고―.
며칠 후 내 입천장에는 한동안 잊었던 그 지긋지긋한 철판대기가 또다시 붙었다.
“게리 쿠퍼같이 되었군….”
자못 만족스러운 듯 C박사는 웃었지만 나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거울에 비친 새하얀 사깃니! 게리 쿠퍼는 좋았으나 그것은 마치 짐승의 이빨을 연상케 하는 것 이었다.
이어 C박사는 씹어 보라는 명령을 내렸다. 잘 되질 않았다.
"허, 씹는 것도 잊었군."
무슨 핀잔이 또 나올까 두려워 나는 열심히 씹는 연습을 했다.
사흘 후 내 입천장이 그 철판대기에 익숙해졌을 무렵 나는 조심스레 깍두기 하나를 씹어 보았다. 와삭. 또 씹어 보았다. 와사삭. 실로 몇 년만이었던가! 그 소리는 연인의 속삭임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이젠 치약도 듬뿍 들 것이다. 이젠 사인을 받으러 온 아가씨를 실망시키지 않아도 될 것이고 그리고 또 이젠 그 형틀에 다시는 올라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⑥ 기행 수필
한때, 세계 여행가들이 쓴 기행문이 베스트 셀러가 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미지의 나라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은, 기행문은 더 이상 특출한 여행가들만이 쓰는 글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기에 기행문을 쓰기가 어렵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전의 그 안이한 자세에서 벗어나려 들지 않는다. 즉 세세한 여행 일정, 친절한 길 안내, 안내 책자에 살붙인 것 같은 관광지 소개, 백과사전에 다 있는 지식의 나열…. 기행문의 세 요소는 체험·감상·여정(旅程)이다. 그러나 기행문이 기행 수필이 되려면 여행지에서 자기만이 체험하고 느낀 것을 주제로 끌어내야 한다. 남들은 느끼지 못한 나만의 철학 여행, 기행 수필은 눈으로 쓰는 글이 아니라 마음으로 쓰는 글이다.
<예문>
모자
鄭惠玉
긴 여행을 계획한 우리는 이틀 전에 취리히를 떠나 제네바에 도착했다.
뤼쩨른·몬테럭스 등의 호반 도시며 인터라켄·스핏스 등의 산간 도시 등은 알프스의 산과 함께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여행 도중 잠시 머물렀던 뤼쩨른에서 유명한 카펠 목교(木橋)를 건너가기 전 어떤 상점에서 모자를 한 개 샀다.
금빛의 둥근 챙에는 자주색 리본과 장미꽃 조화 한 송이가 매달려 있는 화려한 여름 모자이다. 나는 그때 호숫가에서 앞으로 몇 주일을 두고 계속할 여행을 위해 사치한 치장을 하고 싶은 욕망이 문득 일어났었다.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거리, 나의 연령을 짐작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녀처럼 머리 위에 꽃모자를 쓰고 마지막 여행을 아름답게 꾸미리라 했다.
일상에 부딪쳐 오는 생활의 그늘 같은 것은 잠시 멀리 둔 여행길. 감동적인 이국 풍경과 미지의 땅에 대한 기대에 들떠서 산간 열차로 알프스의 산록을 지나올 때 도, 건초가 쌓인 산촌의 가스트 하우스에서 잠시 쉴 때도 나는 그 모자를 쓰고 있었다.
어느 이름 모를 소읍(小邑), 거친 돌로 지어진 고풍(古風)한 성당에서 마침 거행되고 있던 혼례 미사에서도 초대받은 손님처럼 그 모자를 쓰고 회당의 앞자리에서 신부(新婦)보다 더 가슴을 울렁이며 앉아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착각이며 향기로운 회상의 잔치이기도 했다.
우리는 다음 여행지인 몽블랑 산정에 오르기 위해 샤모니로 가는 열차를 타러 갔 었다. 개찰원이 없는 이곳은 승객이 스스로 목적하는 차를 타야 한다. 역에는 이미 열차가 들어와 있었다. 등산복 차림의 승객들이 모두 몽블랑으로 가는 관광객들이라 믿고 우리도 바삐 차에 올랐다. 프랑스어·독일어·영어 등이 뒤섞인 승객들 사이에서 자리를 잡고 모자를 벗어 선반 위에 얌전히 얹어 두었다.
이윽고 열차가 움직이는 기척에 창 밖을 내다보니 차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황급히 짐을 들고 뛰어내렸다. 어떤 사람이 그 열차는 파리 경유 덴마크의 코펜하겐까지 간다는 것이다. 이미 열차는 멀리 평원 위로 모습을 감추었다. 한 차례 바람이 불었다. 머리카락이 흩어진다. 나는 그때 알았다. 나의 머리 위에 모자가 없음을. 어찌 그리 허둥대었을까. 그 모자는 나의 의식 속에 익숙지 못한 손님으로만 존재했던 것일까. 나의 건망증을 스스로 탓하며 아깝고 억 울한 생각에 어쩔 줄 몰랐다.
스물 여덟 시간의 짧은 인연으로 끝나 버린 아름다웠던 나의 모자. 나의 생애에 서 귀하게 얻은 열망의 시간에 그 모자는 하루 낮과 밤 동안 나의 머리 위에서 나 를 오만하고 호사스런 여왕으로 꾸며 주고 몽상적인 사랑을 일으켜 충일한 기쁨에 젖게 하고 남아 있는 여행길을 더욱 확고한 동경으로 이끌어 주더니 이제 낯선 빈 역두에 나만 짐짝처럼 내려 두고 갔다. 인연의 줄은 이렇게 허망하게 끝나 버렸다.
누가 나를 기억하여 줄 것인가. 지난날의 모습을. 그날의 모양새는 몇 장의 사진 속에 남아 있을 것이고 그 모자는 나비의 날개처럼 파닥이며 나의 머리 위에 얹혀 있을 것이다.
이제 일몰(日沒)의 시간. 멀리 낮은 땅에는 낯선 바람이 불어오고 나를 다른 방향 으로 이끌고 갈 열차를 기다리며 멍청히 서 있었다. 그 모습은 꿈을 깨고 난 신데 렐라처럼 초라했었다.
별리(別離)의 아픔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사물에 대해서도 애착이라든가 소유에 대한 욕망 때문에 더 아픈 상처를 받기도 하고, 영 원히 나의 것이라고만 믿던 젊음이라든가 명성이라든가 사랑 같은 것이 얼마나 순식간에 우리 곁을 빠져나가 버리는가를 알게 한다.
많은 것들 중에서 선택되어 인연을 맺고 사랑과 미움의 정이 생성(生成)하고 마침내 서로 떠나고, 이러한 만남과 헤어지는 순서는 우리 삶의 도처에 깔려 있어 우리를 환희롭게도 하고 또 슬프게도 한다.
후일 나의 집에서 안주(安住)할 때 오늘의 기억은 바람처럼 잠잠하여질 것이고 우리의 모습도 점점 변하여 갈 것이다. 그러나, 북구(北歐)의 황량한 땅을 향하여 흔들리며 가 버린 모자의 기억은 언제나 남아 있을 것이다.
작게 접은 푸른 지도를 들고 기웃거리던 이국의 거리며 강이며 산이며 그리고 얼굴들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그 모자는 지난날의 한 부분으로 살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꿈을 꿀 것이다. 그 모자가 나의 깃발이 되고 바람이 되고 또 한 마리 나의 새가 되어 내가 가 보지 못한 이 세상 구석구석을 홀로 돌고 있을 영원한 나의 꿈을 꿀 것이다.
2. 중수필(重隨筆)
경수필이 작가의 신변적인 체험에서 소재를 찾는 수필이라면, 중수필은 일반적이고도 보편적인 문제에서 소재를 찾는 수필이다. 그러므로 경수필은 주관적이고 중수필은 객관적이다. 중수필에서는 작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작가의 철학과 사상만이 있을 뿐이다. 개인의 감정과 문예적 미감을 수용하지 않는 중수필이 소논문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용이 심오할수록 문장은 쉽게 쓰는 것이 좋다. 내용이 어려운데 문장까지 어려우면 뜻의 전달성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구체성이 배제된 중수필, 그 위치는 문학과 철학의 중간이다.
<예문>①
미모(美貌)의 사상(思想)
趙演鉉
이 지상에 아름다운 것이 있다는 것은 확실히 사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원천이 된다. 푸른 하늘과 맑은 공기, 우거진 삼림, 눈부신 각종의 꽃들, 그리고 여러 가지 형태의 이해와 애정! 만일 이러한 것들이 없다면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쓸쓸하고 허전할 것인가. 사람의 미모도 그러한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는 아름다움의 하나 다.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있으면 이상한 충격을 느낀다. 황홀한 즐거움 같기도 하고, 외로운 슬픔 같기도 한 감정의 물결이 인다. 흡사 감동적인 예술을 대했을 때와 같이―이것은 미모도 하나의 예술적인 현상임을 말하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의 창작도 아닌 신의 우연한 은총일 뿐이다.
사람의 육체 중에서 얼굴은 가장 귀중한 부분에 속한다. 그것은 얼굴이 그 사람의 육체 전체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그 정신까지도 반영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동양의 관상학은 사람의 얼굴이 그대로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해 준 것으로 해석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육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남보다 아름답게 타고난 미모의 사람들은, 그만큼 신의 은총을 많이 받은 것이 된다.
미모에는 일정한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 그것은 언제나 미모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주관에 근거된다. 단테에게는 베아트리체가 최상의 미모로서 보였을 것이요, 에 드워드 8세에겐 심프슨 부인이 지상의 유일한 미모로서 비췄을 것이다. 아무리 코나 입이 비뚤어져도 그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얼굴이 미모로 보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사랑의 의식과 완전히 떠난 미모의 의식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미모의 의식과 사랑의 의식은 어쩌면 동일한 감정의 두 개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을 것인지도 모른다.
미인을 선발하는 풍습이 있다.
<미스 코리아>니 <미스 아메리카>니 하는 것이 그것이다.
다수의 투표에 의해서 미인이 결정된다. 미인의 객관성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인을 정말 미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다수의 의사가 미인이라고 결정한 것이니까 미인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미인을 미인이라고 믿지 않는다. 이런 경우의 미인이란 정말 미인이 아니라 미인의 유형일 뿐이다. 미 그 자체가 아니라 여러 사람의 미의식을 조절한 미의 개념일 뿐이다. 미는 감동의 대상이지만, 미의 개념은 감동의 대상이 안 된다. 아무리 아름다운 미스 아메리카 나 미스 코리아도 자기의 애인이 주는 몇 만 분지 일의 감동도 주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것은, 미모란 객관적인 개념이 아니라, 주관적인 실감인 것을 의미 한다.
우리는 그전까지 아름답게 보여지던 얼굴이 별안간에 밉게 보이고 지금까지 밉게 보아 온 얼굴이 어떤 순간부터 별안간에 아름답게 느껴진 여러 가지 경험을 가지 고 있다. 어떠한 우발적인 사건에서 혹은 어떤 경우의 표정 하나로서, 우리는 그전까지 전혀 몰랐던 아름다움이나 미움을 새로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발견 된 미모의 의식이 그 사람의 용모에 대한 우리의 감정적 본질을 결정한다. 이것은, 사람의 얼굴에 대한 미모의 의식은, 그 외형적 조건만으로서 독립된 것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 외형적 조건 이외의 다른 요소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 사람의 내면적인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얼굴이 인간의 생명의 상징이라면 생명의 구체적인 기질인 그 사람의 정신적 인격, 내면적인 조건은 그 사람과의 특수한 교섭이나 경험을 통해서만 얻어진다. 미모가 주관적인 실감이라 는 본뜻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 된다.
우리는 전차나 버스 속에서 혹은 노상에서 옆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얼굴을 퍽 아름답게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러한 미모는 곧 기억에서 사라지고 만다. 곧 기억에서 사라지는 미모란 정말 미모가 아니다. 미모는 그것이 하나의 감동이요, 충격이기 때문에 오래 잊혀지지 않는 곳에 그 생명과 가치가 있다. 일생에 두 번밖에 보지 못한 베아트리체를 단테는 일생동안 잊지 못했다. 그와 같은 작용력이 없으면 미모는 아니다. 이와 같은 작용력은 미모의 내면적 조건이 그 외형적 조건으로 표상됨으로서만 가능해진다.
어떠한 미모도 화장을 잘못하거나 그것을 게을리 하면, 그 아름다움은 거세(去勢) 된다. 화장은 부족의 보충이요 무질서한 것의 통일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자연적인 미를 완전한 창작적인 미로 개변시킨다. 잠자는 사람의 얼굴이 아름답지 못한 것은 방심에서 오는 의지의 불통일 때문이다. 화장에 의해서 미모가 한층 더 확실해 질 수 있다는 것은, 미모는 자연적 현상이기보다는 의지적 형상임을 말한다. 아무리 못난 얼굴도 화장에 의해서 어느 정도 예뻐질 수 있다는 것은 아무리 불미한 정신의 소유자라도 의지의 힘으로 그것을 고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미모는 하나의 신의 우연한 은총이기보다는 오히려 그 자신의 창조적인 노력에 의한 산물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특히 미모에 예민한 여성들은 스스로 자기가 미모이기를 원한다. 호수에 비친 자기 얼굴의 아름다움에 스스로 도취되었던 <희랍> 신화의 나르시스 처럼 자기도 미모이기를 원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특히 여성들은 자기가 얼마만큼 미모가 될 수 있는가를 모르고 있다. 그러나 자기가 나르시스인 것을 알려 주는 사람은 반드시 존재한다. 그 사람을 찾아내느냐 못 찾아내느냐 하는 것만이 자기의 미모를 알게 되는 열쇠가 된다. 자기가 나르시스임을 알려주는 사람을 얻 게 된다는 것은, 자기의 인생을 완성시킨 것이나 다를 것이 없다. 그렇다면 옳은 미모는 자기 인생의 스스로의 완성 위에 있는 것인가?
<예문>②
고독이라는 것
金秉圭
카뮈는 <요나>라는 단편소설에서 우리에게 하나의 물음을 제출하고 있다. 한 사람의 화가가 경제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부러울 것이 없으며, 작품에서도 성공했 지만 살아갈 희망을 잃고 끝내 넘어지고 만다. 화가가 남긴 캔버스에 조그만 글자가 쓰여져 있었는데, 그것은 '솔리테르'(고독한)로 읽어야 할지 '솔리데르'(연대의) 라고 읽어야 할지 명확하지 않았다고 한다(프랑스말 '테 t’와 '데 d'의 차이로, 뜻은 반대다).
우리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하여는 연대가 필요한지, 그렇지 않고 고독이 필요한지, 도대체 고독이나 연대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에겐 잘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평소에 서로서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에게서 그가 숨기고 있는 무엇을 어떤 기회에 발견하게 되면서 놀라는 수가 있다. 인간이란 각자가 개성 을 가진 독자의 존재이므로 우리는 스스로의 '자기'를 깨닫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여느 '자기' 즉, 다른 사람들로부터 밀려 나왔다고 여기게 된다.
이러한 것은 무엇을 똑똑하게 보았다든가 깊이 생각한 사람에게는 들어맞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이란 배는 이미 항구를 떠나오고 말았으며, 우리는 지금 가 령 무엇을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이젠 벌써 너무나 많은 일에 연관을 가지면서 살 기 시작하고 만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고독한 존재이면서 그와 동시에 어떤 형태든 다른 사람과의 연대로부터도 자유롭지 않은 어떤 존재이다. 오히려 '고독'은 모든 사람들의 일 상성에서 각자의 삶의 바닥에, 말하자면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고독이라는 것은 결코 공소한 사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 기의 문제로서 일상생활 안에서 반성해야 할 근원적으로 실존적인 물음의 제출인 것이다.
아마 고독을 여태까지 한번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인간의 실존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두세 살 난 어린아이도 자기 기분을 알아주지 않는다든가 무시되었을 때의 슬픔이나 괴로움을 잘 알고 있다. 누구나 직접 겪는 고독이란 다른 사람, 더욱이 그에 게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 의사의 전달이나 교환이 되지 않고 따라서 사랑을 받지 못하거나 소중하게 여겨지지 않는 일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상태, 예컨대 적막감 같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랑을 받는다든가 소중하게 여겨진다는 것은 고독으로부터 해방되는 데 있어서는 2차적인 가치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의 사의 전달이나 교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먼저 있고 다음에 사랑이 소중하게 여겨진다고 하는 것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알고 있듯이 다른 사람에게 의사의 전달이나 교환이 이루어져 따라서 이해되지도 않으면서 사랑을 받는다든가 소중히 다루어진다는 것은 되레 적막감을 더하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고독의 객관적인 형태는 의사의 전달도 교환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좀더 다듬어서 말하자면 커뮤니케이션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독에는 두 개의 층이 있는데 깊은 층은 커뮤니케이션 자체가 없는 것이며 얕은 층은 사랑받거나 소중히 여겨진다는 것으로 대표되는 정서적 반응의 교환 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고독의 깊은 층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사랑받는다든가 하는 것은 깊은 층이 있고 난 뒤의 2차적인 관심이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은 역할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어떤 역할이든 그것을 연출하는 것이 기대되어 있는 사람은 연기자로서의 그와 '진실한' 그와의 사이에 다소간 간격을 느끼는 것이 보통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전자는 '내밀의 자아'인 것이다. 이 두 개의 자아는 역할과 자기와의 갈등으로 나타난다.
통렬한 전쟁 체험을 겪은 사람일수록 그 체험을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는 귀환 병사라는 역할과 '내밀의 자아'와의 사이의 간격을 뻔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에게는 성서를 읽고있다는 것은 천진한 소냐에게조차 겨우 털어놓은 자기의 비밀이었다. 그리스도 교 도라는 역할과 현실의 자기와의 사이에는 너무나 깊은 단절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수상록>의 몽테뉴는 고독을 좋아했다. 그가 말한 고독은 '육체와 정신의 평정을 방해하는 정렬에서 도피하여 자기의 기질에 가장 걸맞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며 좋은 의미에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몽테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자기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사람들한테서 떨어져 본들 충분한 것이 안 된다. 또한 장소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우리들 자신의 안에 있는 모든 비속한 생활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곧 자기 자신을 격리하여 자기 자신을 되돌려 찾지 않으면 안 된다.'
혼자 있다든가 모두 함께 있다든가 하는 것만으로 고민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은 아직 모자라는 사람이다. 자기가 되며 자기에게 돌아가면서 다른 사람과 연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커뮤니케이션의 결여 속에서는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없다. 고독의 깊은 층은 우 리가 몸을 두고 있는 밖의 세계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 속의, 또한 자 기 속의 세계가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자기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