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사색의 소산 / 도창회
나는 수필 쓸 때는 언제나 환자가 된다. 몸살로 가슴을 앓는 환자가 되는 셈이다. 이 가슴앓이는 내가 좋아서 앓는 병이라 걱정할 건 없다.
‘수필’이란 가슴앓이는 서서히 앓는 병이다. 시처럼 신열이 한꺼번에 작열하는 그런 몸살이 아니라, 이 몸살이 시작되면 미열이 나면서 아주 서서히 앓는다. 신음소리도 못내고 눈까풀이 앙상할 때까지 몹시 앓는다.
이 병을 상습적으로 앓지는 않고 간간이 앓지만, 이 병을 앓을 때만은 고적하다. 왜냐하면 간병해 주는 이는 한 사람 없고 홀로 앓아야 되기 때문이다.(사랑하는 아내마저도 내가 이 병에 걸리면 다 아는 병이라면서 외면해 버린다.)
혼자 좋아하는 ‘짝사랑’이라고 할지, 또는 ‘상사병’이라고 할지, 나는 수필이라는 정인(情人)을 놓고, 나 혼자 그리워하고, 흥분도 하고, 성토도 하고, 경악도 하고, 다시 실망도 하고, 비탄도 하고, 혼자 몰래 눈물을 닦을 때도 있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답답한 속을 혼자서 삭인다. 두 눈을 껌벅거리며, 침을 마른 목구멍에 삼키여, 입술이 까맣게 타들어가면서 혼자 끙끙 앓고 있다.
나는 나를 향해 헛소리의 독백을 뇌까린다. 거울이 곁에 없어 그 미친 듯한 내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혼자 씨부렁거리는 독백은 내 안에서 맴을 돌 뿐 결국 입 밖에 뱉지는 못한다.
어줍잖은 한 꼬투리의 생각을 가지고 온밤을 꼬박 지새워 몸살을 앓지만, 그 이튿날 아침에 와서보면 그렇게 허전한 결과일 수가 없는 것이다. 고작 요것이었구나 싶다.
수필병을 같이 앓는 동반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 “느긋한 가슴의 여유를 가지고, 멀찌감치 바라보는 습성을 기르라”고.
어떤 이는 다작을 권한다. 나는 권하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종종걸음을 친다고 얼마나 더 멀리 갈까 싶다. 느긋한 시간, 느긋한 마음이 수필을 살리는 길이라고 나만은 그렇게 믿고 있다.
주제(영감)가 떠오르든, 소재가 눈에 뜨이면 나는 먼저 가슴이 뛴다. 바로 몸살로 가는 징조다. 이런 현상이 동기 부여가 이루어지는 순간인가 보다.
나는 붓을 잡거나 또는 붓을 잡지 않고도 오랫동안 이게 장차 인간 노릇(수필노릇)을 할까 생각생각 해보는 것이다. 무수히 태어나는 연습을 거듭한 뒤 마음매김을 하는 것이다. 적어도 원고지 칸칸을 메울 그때까지는 많은 세월이 흐르고, 짬짬이 골똘히 문장을 모으고, 얼개도 짜고 진로 수정도 해보고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모든 장난(시도)을 다 해본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내 버릇을 남 주기 어렵겠지만, 주제(theme)를 한 번 잡으면 끝까지 물고서 놓지 않는다. 마치 맞붙어 싸우는 투견처럼 바닥을 보아야만 한다. 적당히는 잘 안되는 것 같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주제를 끌고가는 습성, 이것을 주제의식이라고 할는지 모르겠다.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소재(이야깃거리)들을 주워 모아서 조각보 깁듯이 엮어내는 그런 수필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이야기가 됐던 사건이 됐던 주제가 됐던 하나로 끝까지 끌고가는 힘이 있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나의 고집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수필이라는 ‘몸살’이 진행될 때 가장 고열(高熱)이 날 때는 소재의 실상이 어떤 구체적인 심상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이 때가 창작 과정에서 제일 신이 날 때다. 심상만 굳혀지면 형상화(또는 구상화)하는 작업은 그리 어려울 것 없다.
수필 창작에 아니 모든 문학장르의 창작에 가장 소중한 것은 아마도 상상력인 것 같다. 내게도 그것이 가장 큰 고민이라면 고민이다. 주제나 소재를 얻어놓고도 상상력이 따르지 못하면 땀 낼 노릇이다.
수필은 많은 지식보다 상상력이 남달라야 훌륭한 작품을 낳는 것 같다. 상상력의 빈약으로 인하여 실망스런 작품들이 쏟아져 나온다.
기작(奇作)이나 명작은 상상력이 넉넉한 사람에게서 기대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상상력은 작가에게는 필수적이지만 독자에게도 없어서는 안될 물건이다. 시든 소설이든 수필이든 극작이든 모든 문학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는 높은 상상력이 필요한 것이다.
‘머리를 잘 굴린다’라는 잠언이 있다. 이 말은 지혜(꾀)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한편 상상력을 두고 하는 말이기도 하다. 상상력이란 가만히 앉아서 기대할 수 없다. 부지런히 머리를 굴려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상상의 빈곤에서 오는 창작품들이 오늘날 수필계에 판을 친다. 구상화의 작품들이다. 상상력을 동원않고 본 대로 적어내는 글들이다. 작가의 천재성이 가미되지 않는 글이란 있으나 마나 하다. 작가의 천재성은 바로 상상력에 있다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나는 문장 속에서 언어를 매우 절약하는 편이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문체만은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살아오면서 내가 자주 눈을 돌리는 것은 유머(humor) 소재다. 언제나 두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혼자 찾고 있는 것이 유머 소재임은 말할 것도 없다.
서양 유머가 지적인 것이라면, 동양쪽(우리)은 정적인 유머를 선호하는 성싶다. 나는 이 양 갈등 속에서 헤맬 때가 많다. 우리 것은 ‘눈물 섞인 기쁨의 유머’인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 것이 좋다고만 말 할 수 없다고 본다. 유머의 진미는 서양쪽에 있는 것만 같다.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것 뿐이다. 가령 당신의 수필이 속하는 영토가 어디냐 하고 묻는다면, 관조냐 사색이냐 둘 중 하나만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아픈 사색의 소산”이라고 대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