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외연과 내포 / 여세주

 

   수필을 쓸 때, 말하려는 의도나 목적에 가장 적합한 낱말을 선택해야 한다. 선택한 낱말이 구문이나 문장, 나아가서는 작품의 구조를 구축하고 의미를 표현하는 데에 기여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필요이상의 군더더기인지를 따지면서 집필을 이어가야 된다. 특히, 낱말 선택과정에서 고려해야 할 문제는 어떤 낱말을 사전적 의미만으로 사용할 거서인지, 함축적 의를 지니도록 할 것인지를 신중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르네 웰렉 R.Wellek과 워렌A.Warren은 언어 운용의 방식을 과학어의 외연과 문학어의 내포로 구분하였다. 언어의 외연적 사용은 언어기호와,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 사이에 가급적 1:1의 등식관계를 지니도록 하는 것이다. 누가 보아도 그 낱말이 하나의 대상만을 지시하는 것으로 인식하도록 사용한 경우다. 외연적 사용에서는 하나의 낱말이 어떤 개념이나 사물을 정확하게 지시하고 전달하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따라서 언어의 외연적 사용을 사전적, 명시적, 객관적 사용이라고도 한다. 이와는 달리, 언어의 내포적 사용은 하나의 언어기호가 몇 개의 대상을 지시할 수도 있도록 하여 읽는 사람에 따라 지시하는 대상을 다르게 해석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의 언어기호에 사전적 의미뿐 아니라 되도록 많은 의미를 포함시키려고 함으로써 함축적, 암시적, 주관적 사용이라고도 한다. 언어의 외연적 사용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과학이라면, 문학에서는 언어의 내포적 사용을 제한하지 않는다.

 

   언어의 외연과 내포, 과학의 언어와 문학의 언어가 낱말 자체에서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구절이나 문장, 텍스트적 문맥이나 텍스트 외적 상황 속에서 두가지 언어가 갈라진다. 낱말이 위치하는 맥락에 따라 사전적 의미만을 지니기도 하고 함축적 의미를 드러내기도 하는 것이다. 가령, ‘이제 우리는 스스로 껍데기를 벗고 나비가 되어 날 준비를 해야 한다.’에서 껍데기나비는 문장 속에 들어와서 비로소 함축적 의미를 획득하게 도니다.

 

   해체론을 촉발한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어떤 기표라도 언제든 무수한 기의들을 지시할 수 있다고 하면서 모든 언어는 기표들의 사슬로 이루어져 불명확함과 애매함을 피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사전적 언어와 함축적 언어의 대립적 운용은 무의미하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수필을 창작하는 작가들에게 수필의 언어 운용에 대해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데리다의 설명 도구인 기호 = 기표 + 기의 ……+기의라는 언어 공식을 젖혀 두고 언어기호=기표+기의라는 소쉬르의 공식으로 접근해 가지 않을 수 없다.

 

   일상생활에서든 문학작품에서든 가급적 분명한 의미 전달을 위하여 사전적 의미의 언어 운용을 기본으로 삼는다. 함축적 언어는 사전적 언어를 보완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런 가운데, 문학작품에서 함축적 언어 사용을 극대화하는 장르가 서정시라면, 극소화하는 장르가 수필이다. 수필은 근본적으로 설명적 진술 방식에 의존하는 교술문학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교술은 경험을 객관적으로 나타내는 데에 치중하여, 그 사실을 알리고 주장을 펼치는 장르인 탓이다.

 

   수필의 이러한 측면을 강조한다면, 수필이 함축적인 언어 운용을 굳이 지향할 이유가 없다. 객관적인 사실을 기록하여 전달하는 데에는 설명이라는 진술 방식이 가장 유용하고, 이치를 따지며 주장을 펼치는 데는 논증이라는 진술 방식이 주로 활용된다. 이런 진술 방식에서는 의미 전달이 분명해야 하므로, 사전적 의미만을 지닌 언어들만 사용해도 크게 부족함이 없다.

 

   함축적인 언어 조직이 문학의 본질적인 속성이라면, 수필의 사전적 언어 사용은 비문학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비정형 에세이 가운데 낙태나 안락사와 같은 사회적 이슈에 대한 의견 등을 다루는 문화비평적 논설은 비문학적이라 하여 수필의 영역에서 배제시키려 한다. 수필 본래의 말하기 방식으로 다가갈수록 문학성을 훼손시킨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수필의 장르적 지향과 문학이고자 하는 의지가 상반된 힘으로 작용한다.” 언어 운용의 차원에 한정하여 말하자면, 분명한 전달을 위해서는 언어의 외연적 사용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과, 문학적이기 위해서는 언어의 내포적 사용을 최대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항상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수필 본래의 말하기 방식을 언어 운용의 차원에서만 논할 수는 없다. 장르론의 차원에서 말할 때, 경험을 객관적으로 진술하고 그 의미를 논리적으로 해석하는 데 목적을 두는 수필이 교술 장르 본래의 글쓰기이다. 사회·정치·문화 비평이나 철학적인 에세이가 대부분 이런 유형에 속한다. 근대에 이르러 이러한 글쓰기가 비문학적이라는 생각 때문에, 경험적 사실이나 현상에 대한 직관적 느낌을 표현하는 문학적 수필 쓰기로 나아갔다. 수필을 문학에 귀속시키려는 의도가 수필의 영토를 문학의 영역으로까지 넓혀갔다. 달리 말하면, 문학적 수필에 의한 비문학적 수필의 쇠퇴 현상이 일어났다고 이해하여도 된다.

 

   비문학적 수필과 문학적 수필의 힘겨루기 속에서도, 수필은 교술 장르로서의 속성을 결코 저버리지는 못한다. 언어 운용의 측면에서 문학적 수필조차도 경험의 객관적 표현에 가장 유리한 설명을 기본적인 진술 방식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설명이라는 진술 방식에 의해 주관적인 경험을 객관적으로 전달하려고 하는 수필쓰기에서, 함축적인 언어 운용을 굳이 극대화할 필요는 없다. 함축적 언어 표현은 그 자체가 목적이어서는 안 되며 사전적 언어를 보강하는 효과적 수단이어야 한다. 그런데도, 서정적 수필이 수필다운 수필이라고 옹호하는 이들은 언어의 함축성을 최대화하기 위한 비유적 표현에 온 힘을 쏟는다. 이런 작품이 우수한 수필이라고 상찬을 받는 불상사가 종종 벌어지기도 한다. 비유에 의한 언어의 함축성을 최대한 활용해야 수필의 문학성을 높일 수 있다는 생각에 흠뻑 젖어 있어서 생기는 현상이다.

발췌새롭게 쓴 수필 창작론(여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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