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수필이론에 발목 잡힌 우리의 현대수필/김학

 

. 변화를 외면하는 수필문학

세상은 빠른 속도로 변한다. 나날이 변하고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이 변화에 순응하느냐 낙오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정 반대로 나타난다. 이것은 어느 분야이건 다를 바 없다. 항상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시대적 소명이기 때문이다.

 

미디어의 변화는 예술계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활자매체시대의 총아였던 문학이 전파매체시대에 접어들어 적응하지 못해서 다른 예술장르보다 뒤로 밀려나게 된 현실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 수필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문학의 전반적인 실정이 이처럼 열악할 때 그 중에서도 가장 취약 종목인 수필의 경우는 더 말해 무엇 할 것인가? 우리는 흔히 수필이 21세기를 주도할 문학이며 미래문학이라고들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그런 시대를 앞당기려 노력하지도 않고, 그냥 감나무에서 홍시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듯 나무 밑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게 요즘 수필가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수필은 과거의 몇 가지 수필이론에 발목이 붙잡힌 채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는 게 현실이다. 마치 코뚜레에 얽매인 소가 줄을 묶어놓은 나무 근처만 빙빙 맴돌 수밖에 없듯이.

한국수필의 문학이론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34년 이후부터다. 현동염의'수필문학에 관한 각서(覺書)'(조선일보1934.10.), 한세광의 '수필문학론'(중앙일보 1934.7.), 김광섭의 '수필문학소고'(문학 1935), 임화의 '수필론'(1938), 김진섭의 '수필의 문학적 영역' 등이 그 대표적 이론들이다.


이밖에도 1960년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필이론과 그 이론을 묶은 저서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초창기 몇몇 이론가들이 발표한 그 수필이론들이 족쇄가 되어 아직까지도 우리 수필을 옥죄고 있어 안타깝다. 어쩌면 그 족쇄가 먼 훗날까지도 우리 수필의 발목을 붙잡게 되지나 않을까 심히 걱정이다.

"수필이란 글자 그대로 붓 가는 대로 써지는 글일 것이다."(김광섭)
"수필은 무형식의 문학이다."(김광섭)

"20대에 시를 쓰고 30대에 소설을 쓰고 40대에 수필을 쓴다."(피천득)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피천득)


수필평론가들이나 수필가들은 이 말에 대하여 치열한 이론(異論)을 제기하면서도 그 수필이론(隨筆理論)의 잘못과 그로 인한 후유증을 말끔히 씻어내지 못하고 있다.

수필을 사랑하는 이들이야 거두절미하고 인용한 그 이론의 부당성을 잘 알기에 반론을 제기하지만, 수필에 애정이 없는 이들은 얼씨구 좋구나 하면서 그 인용문을 앞세워 수필의 위상을 깎아 내리는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 노루 뼈 우려먹듯 하는 처사가 못마땅하다.

그릇된 어제의 수필이론에 발목이 잡혀 우리의 현대수필이 한 발짝도 미래로 나가지 못한다면 그건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수필은 공해(公海Public Sea)나 마찬가지였다. 초창기에는 시인, 소설가, 교수, 신문사문화부기자 등이 자기네 주 업무를 수행하면서 여기(餘技)로 무주공산이던 수필의 영토에 드나들며 수필을 낚았었다. 그러기에 한 때 수필이 '여기의 문학'이란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는 한국일보와 조선일보 등 신문의 신춘문예와 각종 문예지의 신인상 제도로 인해 전문수필가들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많은 전문수필가들이 배출되었지만 아직도 수필이 수필가들만의 전관수역(專管水域)이 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일부 신문이나 잡지 편집자들은 수필가들에게 시나 소설 등 다른 장르의 원고를 청탁하지 않으면서, 다른 장르의 문인에게는 수필원고를 청탁하는 게 예사롭다. 아직까지도 수필가들이 수필의 영토를 확고하게 지키지 못한 탓이다.

이는 마치 축구경기를 하면서 전문 골키퍼 없이 이 선수 저 선수에게 돌아가면서 적당히 골문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는 전문수필가들이 시인 수의 절반에 가까운 2천여 명이 넘는다는 데 아직도 수필이란 놀이마당조차 지키지 못한다는 것은 문제다. 이것이 우리 수필의 현주소다.

. 지금은 수필의 춘추전국시대

수필의 전성시대가 도래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전국적으로 고을마다 차려진 수필공부방에 수강생들이 몰리고 있고, 지역마다 수필동인회가 생겨서 동인지를 내며 활발하게 창작활동을 펴고 있다. 문학평론이나 다른 문학 장르에서 평생을 바친 이들이 노후에는 옛날의 서당 같은 수필공부방을 열고 수강생들을 모아 수필을 가르치는 경우가 크게 불어나고 있다. 그게 요즘 우리 문단의 한 특징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발행되는 종합문예지가 2백여 종이 넘고, 수필전문지만 해도 18종이나 출간되고 있다. 종합문예지나 수필전문지들이 신인상제도를 마련하여 수필가를 양산해내고 있다.

이들 문예지나 수필전문지들이 해마다 수많은 신인수필가들을 배출하고 있다. 이들 신인들은 수필이란 바다에 나와서 치열한 살아남기 전쟁을 치러야 한다. 3억 마리의 정자들이 치열하게 경쟁하여 그 중 한 마리가 난자를 만나 임신이 되듯이 말이다. 어떤 세상이든 적자생존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들 신인수필가 중에는 해가 뜨면 사라지는 아침이슬 같은 낙오자가 있다는 점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요즘에는 각 문예지나 수필전문지마다 수필평을 싣고 있다. 좋은 현상이다. 그런데 일부 수필평론을 하는 분들 중에는 수필인구의 증가에 비해 수필작품의 수준이 높아지지 않는다고 우려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그게 현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말은 나무 한 그루를 보고 숲을, 모래 한 알을 보고 사막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 공허한 이야기로 들리기도 한다. 또 수필을 재는 그들의 잣대가 옛날 식 그대로라는 점도 문제라면 문제다.


어떤 이는 수필평을 쓰고 좋은 수필을 고르려고 1년에 1,800편의 수필을 읽었다며 자랑하기도 한다. 그런데 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에 등록된 수필가 2,200명과 아직 한국문인협회에 입회하지 않은 등단수필가를 약 1,000명 정도로 추산하여 모두 3,200명이라고 하면 1년에 한 사람 당 2편씩만 수필을 발표해도 무려 6,400편의 수필이 쏟아진다는 계산이다.

또 이들 작품이 각종 문예지와 수필전문지, 동인지, 사보, 신문 등에 발표될 테니 그 방대한 자료를 누가 무슨 재주로 다 구해서 읽을 수 있겠는가?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창작되는 수필이 1년에 만 편도 훨씬 넘을 것이다. 그러니 나무 한 그루를 보고 숲을 이야기하며 모래 한 알을 보고 사막을 평한다고 비판한다면 무어라고 변명할 것인가?

. 우리수필이 가야할 길

문학이 아니, 수필이 언제까지나 제자리에서만 맴돌기를 바라는 이는 없을 줄 안다. 수필도 더 넓은 세계로 나가야 할 것이다.

한류열풍을 일으키는 다른 예술장르를 문학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학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는 것 같다. 아니 남의 일처럼 여기는 것 같다. 이 문제에 대하여 고민하는 문인이나 문학단체도 없는 것 같아 아쉽다.

수필을 비롯한 문학은 왜 이 좁은 국내시장에서만 자웅을 겨루려 하는지 모르겠다. 문학이 더 넓은 세계로 나가려면 번역이 더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문학이 세계로 뻗어나고 우리문학도 한류열풍에 동참하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문학의 세계화와 한류열풍 확산에는 여러 장르 가운데서 수필이 가장 적격이라고 생각한다.


드라마나 영화, 음악도 따지고 보면 모두 우리말을 사용한다. 다만 외국에 수출할 때는 그 나라말로 자막이나 가사를 번역해서 소개해야 한다. 문학 특히 수필도 한글을 사용하는 것은 한류열풍을 불러일으키는 다른 예술장르와 다를 바 없다.


수필도 작품만 좋다면 드라마나 영화, 음악처럼 외국에서 한류열풍을 일으키지 말라는 법이 없을 것이다. 그처럼 원대한 꿈을 키우는 일이 수필의 미래를 열어 가는 방안이 되었으면 한다.

그런 날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우리 수필의 발목을 잡고 있는 애매모호한 낡은 수필이론에서 과감하게 벗어나야 한다. 계란껍질이 깨트려져야 튼튼한 병아리가 탄생될 수 있듯이 낡은 수필문학이론에서 과감히 벗어났으면 좋겠다.

독자의 입맛이 변해서 그 독자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옛날 메뉴로만 식탁을 차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먹거나말거나 식 식탁을 차리는 수필가가 있다면 그는 바보일 것이다.


독자의 변화된 의식을 꿰뚫어보고 독자의 필요(Needs)와 요구(Wants)를 헤아려 한 발 앞서서 작품을 창출해 낼 수 있는 역량을 길러야 오래 살아남는 수필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수필문학이 미래문학으로 온 문예를 주름잡을 날도 멀지 않았다고 한 아나톨 프랑스의 예언에서 우리는 다시 수필의 희망을 찾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