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 / 지영미

 

 

작은 소리도 놓치면 안된다. 원시인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사나운 동물이 뛰쳐나올까 봐, 간이 쪼그라들었다. 수풀 뒤에서 나는 부스럭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하얀 토끼를 쫓을 땐 눈코귀도 토끼를 앞질러야 했다. 살갗에 돌기가 온몸을 뒤덮었다.

 

미지의 하늘과 비바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길을 막았다. 세기를 가늠하고 방향을 돌렸다. 사막의 모래바람이 소용돌이쳤다. 귀를 열고 발을 파고드는 모래알의 감촉으로 가는 길을 가늠했다. 파도 소리와 짭짤한 물 냄새, 온산을 뒤덮은 싱그런 향기, 몸은 신호를 감지하면서 진화를 거듭해 더욱 예리해졌다.

 

몸에 달린 감각들은 그대로지만 하는 일은 달라졌다. 계곡과 절벽을 누비며 과일을 따고, 멀리 있는 먹잇감도 단박에 알아보던 밝은 눈은 모니터 앞에서 동공을 맞출 뿐이다. 생고기와 딱딱한 열매를 먹어야 했던 이빨은 퇴화했지만, 혀끝 미각은 풍성한 식탁 앞에서 춤을 춘다. 짐승 같은 감각은 흐지부지 사라지고 아슬아슬 법망을 피하는 이기적인 촉만 남았다.

 

한때, 비상을 꿈꾸며 안테나를 치켜세웠다. 말간 구름이 창에 걸린 사각형 집들은 눈이 부셨다. 손가락으로 사진을 찍어두고 땅따먹기 행렬에 줄을 섰다. 발품도 팔았다. 아귀다툼의 시장에서 튀어야 사는 자는 기민하고 예리해야 했다. 신발이 닳도록 윤나게 갈고 닦았다. 날 선 촉에서는 단내가 났다.

 

하루하루를 버거운 삶을 사는 우리가 초원의 원시인과 무엇이 다른가. 그때의 맹수는 문명사회에도 우글거린다. 살아남기 위한 본능이 여전히 꿈틀댄다. 먹을 것과 잠자리가 있지만, 두려움은 여전하다. 지지직거리는 세상의 소리를 모으려 안테나를 사방으로 늘린다. 주파수를 맞추려 이리저리 굴린다. 불길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몸이 달아오른다.

 

엄마의 촉은 더 예리했다. 일터에서 들리는 남의 집 아이의 울음소리에, 선뜻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니나 다를까 열이 심한 아이는 전화기 너머로 자지러질 듯 울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점점 더 촉수를 길게 늘였다. 땅속줄기가 햇빛을 향해 뻗어 나가듯 나의 온기와 말소리가 멀리멀리 아이에게 닿기를 바랐다.

 

촉은 깎이고 단련되어 감으로 자리 잡았다. 일찍 품에서 떼어낸 아이는 산만했다. 조급한 엄마는 아이를 옥죄고, 그럴 때마다 불안한 아이는 큰 눈만 껌뻑거렸다. 마음이 추운 아이는 눈치를 보며 주변을 맴돌았다. 무시로 찾아드는 부정적인 마음은 내 감이 만들어낸 굴레였다. 나는 따뜻한 촉수를 내밀어 아이에게 살며시 둘러주었다. 채찍만 휘두르던 엄마는 달달한 당근도 내밀었다. 심하게 눈빛이 흔들리는 날에는 부러 빠져나갈 곳도 터주었다. 아이가 숨 쉴 구멍의 크기는 내 감이 어림잡았다.

 

굳이 보고 듣지 않아도 될 일들이 넘쳐나던 곳에서 염증이 났다. 매체는 어디서든 나타나 듣고 싶지 않을 때도 귀를 자극했다. 무방비로 노출되는 방송 광고들이 남처럼 똑같이 걸으라고 재촉했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애면글면하는 일상이 가슴을 답답하게 짓눌렀다. 어눌해진 촉수는 움츠러들기만 했다. 자연의 촉수가 나를 끌어당겼다.

자연에 뿌리내린 촉들을 흡수한다. 안개 자욱한 숲길과 뭇 새들의 지저귐, 나뭇잎이 수런거리는 소리에 혼곤한 정신이 나긋해졌다. 산을 뒤덮은 이내가 물러가면 교교한 달빛이 숲을 드리웠다. 사무치는 풀벌레 소리가 잦아들고 나무가 어둠을 빨아들인 까만 밤, 부질없이 세우기만 했던 촉들이 생각났다. 놓쳐버린 친구와 지인들의 얼굴이 번 갈았다. 벼리기만 했던 촉이 촉촉하게 무디어졌다.

 

숲길을 걸어 들어간다. 온기를 머금은 바람이 분홍 꽃망울에 스친다. 몽그르르 꽃이 피어난다. 익숙한 바람 냄새에 하얀 털 뭉치는 소용돌이를 치며 날아간다. 햇살 앉은 잎사귀는 큰 숨을 들이켜며 초록으로 빛난다. 수줍은 꽃은 어스름 기운을 타고 속눈썹을 올리듯 꽃술을 치켜세우며 밤을 밝힌다. 한 점 빛을 향해 날아드는 벌레는 노오란 꽃술에 몸을 비빈다. 서늘한 기운이 감돌면 꽃은 지고 씨앗은 여문다. 그들의 촉은 공존을 위한 감지 버튼이다.

 

흙 위에 등을 누인다. 살아 있는 것들의 기척, 팽팽하지 않은 것들이 꼼지락거린다. 위를 향해 밀어 올리는 흙의 생명력을 품는다. 살랑이는 바람은 꽃잎을 훑고 와 내 뺨을 스치고, 향기를 부려놓는다. 파란색 바탕에 꼬리를 물고가는 구름과 하늘이 넉넉함을 빚어낸다.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몸 안으로 스민다. 부드러운 이파리와 그들이 뿜어내는 냄새들로 내 안의 감촉들이 순화되어 간다.

 

촉은 그렇게 살며시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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