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 빵 / 박금아

새벽 다섯 시, 부스럭거리는 비닐 소리가 적막한 집 안을 깨웠다. 낯선 잠자리 탓에 뒤척이다가 물을 마시러 가던 나는 그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부엌으로 이어진 복도 끝에서 그가 빵 봉지를 집어 드는 모습이 보였다. 어둠 속에 멈춰 선 뒷모습은 성물(聖物)이라도 받아 든 듯했다. 나중에 들었지만, 제부는 매일 아침을 그렇게 연다고 했다.

이십 년을 훌쩍 넘겨 미국에 살고 있는 동생을 만나게 됐을 때, 전화를 걸어 무엇을 가져가면 좋을지 물었다. 처음엔 필요한 게 없다더니 전화기 너머로 잠시 말이 끊겼다. 그러고는 뜻밖에도 한국산 A사 영양제를 사 오라고 했다. 미국 여행을 다녀온 지인들에게서 영양제를 선물로 받은 기억이 떠올라, 우리나라 영양제를 사 오라는 말이 맞는지 되물었다. 동생은 제부가 매일 먹는 것이라며 다시 부탁했다.

애틀랜타 공항에 도착하니 동생 부부가 나와 있었다. 동생은 예전에 비해 별로 변하지 않아 보였지만, 제부는 어느새 백발이 성성했다. 골프와 스키, 요트를 즐기며 멋쟁이로 살던 기색은 사라지고, 세월이 얼굴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날 밤, 제부는 내가 건넨 영양제를 두 손으로 받아 들고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다음 날 아침, 새벽같이 일을 나가는 제부를 배웅하고 돌아와 보니 식탁 위에 눈에 익은 빈 빵 봉지가 놓여 있었다. 두 개로 갈라진 빵 사이에 달달한 흰 크림이 소복이 들어 있는, 어린 시절 자주 먹던 둥근 달 모양의 빵이었다. 동생은 제부가 매일 아침 그 빵 한 개와 영양제 한 알을 보약처럼 챙겨 먹는다며 냉동고를 열어 보였다. 얼린 빵을 전날 밤 하나씩 꺼내어 식탁에 올려두면, 새벽에 먹고 일을 나간다는 것이다.

그 나라에는 질 좋은 밀가루로 만든 맛있는 빵이 많을 텐데, 한국에 사는 나조차 오래전에 잊어버린 빵을 아침마다 먹는다니 갸웃해졌다. 동생은 교민들 사이에 그 빵이 인기라며 한인 마트에서 늘 사다 둔다고 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초기에 샌드위치 가게를 열어 정착금을 모았을 정도로 음식 솜씨가 좋은 아내를 두고도, 왜 그 빵을 먹는지는 쉽게 헤아려지지 않았다.

그날 밤, 산책을 나갔다. 마을 앞을 흐르는 차타후치강의 물소리가 인적 없는 마을의 정적을 더 깊게 만들었다. 집들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먼 곳에 있는 별빛처럼 아득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내가 떠나온 고국조차 별빛처럼 멀게 느껴져 나 자신이 타향의 떠돌이별이 된 듯했다.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밤이 깊을수록 강물 소리는 더 또렷하게 들려왔다. 창밖 어둠 속을 지나는 겨울바람 소리에, 객수(客愁)에 젖어들었다. 그때 어디선가 가느다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옛일 생각이 날 때마다 우리 잃어버린 정 찾아…….”

제부가 머무는 방 격자창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그는 매일 밤, 잠들기 전이면 한국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노랫말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고국으로 보내는 서글픈 안부처럼 들렸다. 가만히 듣다 보면 지친 철새가 밤마다 제 고향의 울음소리를 연습하는 애처로운 몸짓 같기도 했다. 지금은 노래로밖에 만날 수 없는 사람들과,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이 차가운 밤공기 속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고 있을 뒷모습이 오래 남았다.

IMF 때, 하던 사업이 무너진 뒤 그는 도망치듯 고국을 떠났다. 육체노동으로 일구는 이국의 삶 속에서 ‘영어’라는 낯선 벽은 그의 욕망과 언어를 얼마나 옥죄었을까. 낮 동안 눌러 두었던 긴장은 혼자만의 밤에 이르러 익숙한 노랫가락으로 흘러나온 듯했다.

좋은 먹거리들이 많아서 몸 걱정은 않는다더니, 정작 마음을 단단하게 해 줄 영양소가 필요했을까. 제부에게 보름달 빵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었을 것이다. 커피 한 잔에 빵 한 조각을 머금으면 입안 가득 한국어가 돌아오고, 비로소 온전한 존재로 회복되는 신성한 의식이었으리라. 타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제 안의 것들을 하나씩 떼어내야 했을 것이다. 말을 버리고 익숙한 것을 지우며 스스로가 점점 소멸해 가는 느낌을 받을 때마다, 둥근 빵 한 조각을 베어 물며 자신의 뿌리를 필사적으로 붙들었을지도 모른다.

보름달 빵은 매일 새벽 그의 몸속에서 둥근 달로 떠올라 고단한 하루를 견디게 하는 영적 양식이 되었을 것이다. 하얀 크림이 도톰히 발린 빵 한 조각을 베어 물면 북촌 집 마당 남산 너머로 떠오르던 달이 보이고, 골목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의 함성이 들리고, 장독대 옆에서 숨바꼭질하던 동그란 얼굴의 소녀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던 그의 고백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날 밤에도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차 한 잔이 생각나 부엌으로 갔을 때, 거무레한 달빛이 내려앉은 보름달 빵 한 봉지가 식탁 위에 적막처럼 놓여 있었다. 창밖을 보니, 제부가 띄워 올린 그리움일까. 마당의 키 큰 단풍나무 가지 끝에도 둥근 달이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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