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자기 / 이봄희
서산에 걸린 해가 낮을 재운다. 발길이 뜸하던 시장통은 파장 준비로 분주하다. 시장 귀퉁이에서 종일 좌판을 지키던 할머니는 옆에 개켜 두었던 보자기를 펼친다. 바람이 불어 펄럭이는 보자기를 한 손으로 잡고 한 손으로는 온종일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리던 부추, 사과, 상추를 끌어 담는다.
텅 빈 자리에 잔영이 일렁인다. 보자기는 끝이 마른 부추, 흠집 있는 사과, 시든 상추를 남김없이 감싼다. 한쪽이 불쑥 튀어나온 보자기의 품새가 “사과 여기 있어요”라고 말하는 듯하다. 보자기의 부드러운 물성이 물체 본연의 모양을 그대로 싸 안는다. 잘 나고 못 남도 가리지 않고 보듬는 보자기는 엄마의 마음을 닮은 것 같다.
결혼 초 친정에 가면 엄마는 싱크대 한편에 보자기를 두고 나를 기다렸다. 배추김치, 깻잎김치, 마늘장아찌, 멸치조림을 밀폐 그릇에 담았다. 반찬통이 없을 때는 뚜껑 있는 식기에도 넣었다. 색이 바래고 크기와 모양이 들쭉날쭉한 통이지만 보자기로 싸면 그만이었다. 엄마의 따뜻한 마음도 함께 싸서 돌아오는 길은 골목 어귀 낡은 간판도 정겹게 느껴졌다.
내 마음은 각기 다른 모양의 반찬통처럼 시시때때로 변한다. 타협을 외면할 때는 각진 그릇이 되고, 고루한 생각을 고집할 때는 손때 묻은 플라스틱 통이 된다. 오해로 날 선 말을 주고받을 때는 뚜껑이 맞지 않는 식기 같다. 실수를 하고 후회할 때는 내 마음도 금이 간 유리그릇이다.
삶이란 여정 속에는 예상치 못한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감정조절을 못 해 불시에 나온 행동, 시험장 앞에 갔는데 수험표를 놔두고 온 일, 기대하던 여행을 떠나는 날 찾아온 심한 복통은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 그때마다 어깨를 다독이고 새로운 걸음을 내딛게 한 것은 누군가의 마음 보자기였다. 미숙한 나는 보드라운 싸개 속에서 조금씩 성장하는 고치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따뜻한 보자기는 상처로 생긴 거스러미를 시나브로 소멸시켜 주었다.
일전에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대구행 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다. 이제 막 대전으로 출발하려는 차로 대학생처럼 보이는 청년이 급하게 달려왔다. 연이어 기사에게 두 손 모으고 머리를 조아렸다. 자신이 끊은 표는 한 시간 뒤인데, 어머니가 위독하여 서둘러 가야 하니 탑승을 허락해 달라고 했다.
기사 아저씨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버스에 발을 올리던 아주머니가 자신의 표를 내밀었다. 청년의 손에 들린 꼬깃꼬깃해진 표가 얼마나 불안했나를 말하고 있었다. 그제야 안정을 얻은 청년은 연신 고개를 굽히며 버스에 올랐다. 청년과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덮고 있던 긴장이 안도로 돌아섰다. 아주머니가 펼친 마음 보자기 덕분에 좁은 계단에서 생긴 온기가 넓게 퍼져나갔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 주인공 빌 펄롱은 수녀원에 갔다가 학대받는 소녀를 발견한다. 양심과 자기보존 본능 사이에서 며칠을 고민하다가 그녀를 구출할 결심을 한다.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라는 양심의 소리가 그의 발길을 이끌었다. 그와 내가 거울 안과 밖의 모습일까. 나는 아직도 마음 보자기를 시원하게 펴지 못하고 만지작거릴 때가 많다. 때로는 내 기준에 맞추어 타인을 재단하고 있을 때도 있다. 빌 펄롱이 펼친 마음 보자기에는 작은 친절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다.
아낌없이 보자기 펴는 사람을 주변에서 자주 만난다. 평생 모은 재산을 장학금으로 기부하는 할머니, 오지 마을에서 봉사하는 의사, 어르신들의 머리를 무료 봉사로 손질하는 이발사, 다리가 불편한 친구 가방을 대신 들어 주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 웃음이 가득하다. 보자기를 뜻하는 한자어 ‘보椺’가 ‘복福’과 음이 비슷하여 복을 싸둔다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복을 나누는 보자기 같은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인지도 모른다.
여름빛을 머금은 산이 눈부시게 푸르다. 한 알 한 알의 씨앗이 자라고 퍼져나가 삭막했던 지구를 이처럼 풀과 나무로 무성하게 만들었다. 흙이 다양한 종류의 씨앗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였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보자기도 흙의 마음을 닮아 사람의 슬픔과 고난을 가리지 않고 품는다. 그러니 사소한 일상에서 배려와 공감이 든 보자기를 펼 때, 기대하지 않았던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도 있으리라.
자신이 가진 최상의 것을 세상에 주면, 그것이 내게 돌아온다는 말이 명징하게 다가온다. 차표를 얻은 청년은 세상이 주는 따뜻함을 마음 보자기 안에 오래 간직할 것 같다. 친절이 필요한 어느 날, 기꺼이 마음에서 보자기를 꺼내리라. 신은 자신이 보낸 전령사 어머니도 평생 동행할 수 없으니 사람들 마음에 보자기를 넣어두었나 보다. 가슴 속에 접어두었다가 펼치면 배려와 공감의 향내가 퍼져 나오는 보자기를.
인생의 산을 오르며 힘들어할 때 결결이 내 앞에 펴지던 마음 보자기. 이제 인생의 고갯길을 내려가며 내가 보자기 펼칠 곳을 살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