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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홍의 서사―서안나 (1965∼)

                                                                  분홍 속엔 분홍이 없다


흰색이 멀리 뻗은 손과
빨강이 내민 손

나와 당신이
정원에서
늙은 정원사처럼
차츰 눈이 어두워지는

​​​​​​사라지는 우리는

분홍


 

 

​​​​​​초록으로 무장한 여름 한복판을 걷다 눈이 환해질 때가 있다. 아기 얼굴만 한 수국을 주렁주렁 매단 꽃나무와 마주하게 되거나 낭창하게 흐드러진 능소화를 볼 때, 백일 꽃을 피운다는 목백일홍 앞에 설 때 감탄한다. 봄에는 잎이 예쁘고 여름에는 꽃에 마음을 더 빼앗기게 되는 까닭이다.


오래전 미소가 아름다운 어르신께 분홍 수국을 선물한 적이 있다. 작은 마음을 전한 것뿐인데 어르신이 연신 수국에 코를 대 보며 기뻐하셨다. 그때 생각했다. 수국은 점잖게 나이 든 분에게 썩 잘 어울리는 꽃이구나. 화사한 청춘일 때는 꽃의 아름다움을 다 알지 못한다. “분홍 속엔 분홍이 없고” 젊음 속엔 젊음이 없으니까. 만발한 꽃나무 앞에서 감동할 수 있는 사람은 한때 만발한 꽃나무였던 적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어릴 때는 분홍이 화사하고 귀여운 색깔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분홍은 너무 고와 슬픈 색 같다. 흰색과 빨강이 조심스럽게 섞이거나, 반대로 느릿느릿 멀어질 때 만들어지는 색이 분홍이다. 나와 당신이 아주 희거나 아주 빨갛게 되어서는 만날 수 없는 시간이 ‘분홍’ 아닐까? 어쩌면 분홍은 여름 저녁 정원에 홀로 선 “늙은 정원사”가 여름의 찬란 속에서 슬퍼질 때에야 이해할 수 있는 색일지도 모른다. 여름꽃은 찬란해서 슬프다. 분홍 속에는 분홍이 없다.

 

 

< 박연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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