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예찬 / 강동우

그들이 썩 친절한 편은 아니다. 시선은 나를 향하지만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고, 나와 얘기하지만 모두에게 말하고 있다. 상록수처럼 사시사철 초록 옷을 입는 그들 앞에서 나는 포즈를 취한다. 행인 1, 행인 2와 같이 잔상으로만 남을 포즈를.

“주문하시겠어요?”

“터키 베이컨 아보카도 십오센티요.”

그들 앞에 몸을 정물처럼 놓아둘 때까지 족히 오 분은 걸렸다. 멀찌감치 서서 메뉴판을 보며 심사숙고하는 시간이었다. 칙칙폭폭 열을 지어 샌드위치가 가는데, 나의 망설임 따위가 감히 그 일사불란한 행진을 흐트러뜨릴 수는 없었다.

매장 안 잘 보이는 곳에 메뉴판에 없는 메뉴가 크게 붙어있다. 새롭게 출시한 정식 메뉴는 아니고, 시즌 한정 메뉴인 듯한 뉘앙스다. 요즘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이색적인 메뉴들이 우후죽순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사라지고 있다. 저것도 그러한 운명이겠지. 한 계절 직원들을 흠씬 괴롭히고 손에 익을 때쯤 떠나가는. 그리고 다음 계절 또 다른 계절 메뉴가 찾아오고. 나는 클래식 음악을 찾아 듣는 편은 아니지만, 메뉴만큼은 클래식을 고른다.

“빵은 뭘로 하시겠어요?”

“화이트 브레드요.”

빙고. 오늘은 화이트 브레드, 너다. 샌드위치 종류만 고르면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 깜빡이도 없이 들어오는 질문에 빵 사진만 멀뚱멀뚱 바라보던 시절이 아득하다. 어느 순간 빵 종류 여섯 개 중 세 개는 머릿속에서 아예 지워버렸다. 대체로 화이트 브레드. 기분에 따라 플랫 브레드, 혹은 곡물 브레드. 오늘은 보통날. 영락없이 화이트 브레드를 택한다.

“치즈는요?”

“아메리칸 치즈요.”

느닷없는 고백이지만, 내 마음에는 초록 옷 청년들에 대한 존경심이 조용히 숨어있다. 그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나의 존경심을 얻는다는 게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다. 나는 단지 내가 잘 못 하는 것을 잘하는 사람을 존경할 뿐이다.

갖고 있던 부동산값이 올랐다거나, 주식과 코인이 대박을 쳤다거나, 월에 천을 번다거나 하는 것에는 좀처럼 존경심이 동하지 않는다. 운에 따라 좌우되고, 잃을 것을 담보로 해서 그런가. 세상이 나를 점지한다면 나 역시 떼부자가 될 수 있겠으나, 죽었다 깨나도 수많은 레시피를 외우고, 손님에게 질문을 하면서, 휘몰아치는 주문을 소화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데워드릴까요?”

“네.”

두말하면 잔소리. 안 데워먹는 사람도 있을까. 이런 의문이 들더라도, 어른의 대답이란 네 혹은 아니요. 그럼 안 데우고 그냥 주려고 했느냐는 반문이나 당연한 거 아니냐는 자기애적 호소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의 대답. 초록 옷 청년들도 진실로 궁금해서 묻는 것은 아니다. 매뉴얼에 있으니 가볍게 여기지 못할 뿐.

그물처럼 짜인 매뉴얼 안에서 속절없이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나에게만큼은 표준을 벗어나 센스를 발휘하도록 요구할 수 있을까. 틀을 박차고 나와 도전하고 성장하라며 함부로 채찍질할 수 있을까. 그보다는 매뉴얼 안에 조용히 같이 있어 주는 건 어떤지. 발밑에 직접 꽃길을 깔아줄 것이 아니라면.

“안 드시는 야채 있으세요?”

“다 먹습니다.”

사실 나는 피클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굳이 빼달라고 하지 않았다. 행인 1 또는 행인 2로서의 본분을 지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 이 연극에 피클 없는 샌드위치는 없다고 치자.

내가 좋아하지 않는 피클, 시큼하게 늘어진 피클 주위로 양상추, 토마토, 올리브, 피망, 할라피뇨와 같은 야채가 나의 취향과는 무관하게 누워있다. 숨을 죽인 채 샌드위치로 태어나기 전의 가장 조용하고 평온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 이 터널을 지나, 빵 사이에 꾹꾹 눌러 담겨 샌드위치의 일부가 되면, 야채들 앞엔 누군가의 먹이가 되어야 하는 숙제 같은 생애만 남게 되겠지.

“소스는 뭘로 하시겠어요?”

워워워. 생각의 고삐를 당긴다. 중요한 선택의 시간이 왔다. 미리 정해두기를, 고소한 랜치 소스는 붙박이로 두고, 그때그때 입맛에 따라 달콤한 허니머스터드와 매콤한 사우스치폴레를 고르기로 했다. 오늘은 왠지,

“랜치랑 사우스치폴레요.”

샌드위치가 달린다. 빵에 풀이 돋고 꽃이 핀다. 알록달록 샌드위치를 사이에 두고 초록 옷 청년과 내가 각각의 플랫폼에 서 있다. 저쪽에서는 손끝으로 샌드위치를 여미며, 이쪽에서는 그저 입맛을 다시며, 빵과 치즈와 고기와 야채와 소스의 행적을 좇는다. 플랫폼이 다르면 가는 방향도 다를 줄 알았는데, 샌드위치 가게에서는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

고용 없는 성장 시대. 부모보다 가난한 시대. 누구나 뭐든 할 수 있어서 누구든 뭣도 할 수 없는 시대. 아름드리나무 그늘 아래서 큰 풀, 작은 풀이 너도나도 숙제하듯 살고 있다. 10년, 20년 단위로 MZ니 뭐니 이름 붙이며 억지로 세대를 구분 짓지만, 이러한 시대에서도 한번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삶은, 세대 이름이 다르다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네.”

이 시대는 알바를 스펙으로 치지 않는다. 샌드위치를 밥으로 치지 않는다. 지금 하는 일이, 지금 때우는 끼니가, 각각의 주된 것은 아닐 터. 너도나도 가외의 것들을 열심히 해치우면서 한 뼘씩 자라고 있다. 와락 샌드위치를 먹는다. 손이 초록이다. 입도 초록이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