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세포 / 박순태

수목이 동안거에 들었다. 활엽을 다 지운 숲속의 고요함이 자연의 순리이건만 홀연하다. 나목을 마주하니 화두 하나에 몰입한 선승이 연상된다. 다가올 다음 차례는 지금, 이 순간에서 생성된다며 북풍한설 속에서 묵상으로 설파하는 나무. 가지 끝의 잠잠한 호흡에서 따끈따끈한 진리가 샘솟는다.

빙결에 오들거리는 나뭇가지가 생명의 근원을 품었다. 하늬바람에 물들어 높바람에 잎 떨구니 꽃눈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은 듯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줄기는 사명을 다한다는 각오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궁 속 태아인 양 화아花芽를 발육시킨다. 엄동에 어찌 잉태했을까. 영양 공급이 없다면 메말라버렸을 텐데 물관부는 한파를 견디어내는 기법이라도 있는 것인가. 뿌리는 무슨 괴력으로 쉼 없이 펌프질하여 영양을 우듬지까지 끌어올릴까. 의문을 먼저 내미는 자연이다.

한풍의 놀이터가 된 산에서 나뭇가지가 마술을 부린다.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의 격정적 선율을 묘수로 받아넘긴다. 며칠 전 그대로인 듯 짐작되건만 줄기에 생명의 근원이 커가고 있다는 현상이다. 광풍을 만난 나뭇가지가 광기로 맞서 에너지를 한껏 발산하자 꽃눈이 볼록볼록 부풀어 오른다. 봄의 예고문일런가. 어제의 꽃눈이 오늘의 꽃눈이 아니다. 욕망이 동장군의 시간을 먹고 먹으면서 환희를 향해 가속도를 붙인다. 하지만 숲을 이루는 나무의 근본 외형은 큰 틀에서 볼 때 본래 그대로다.

생강나무 줄기가 꼼지락거린다. 볼을 에는 찬바람이 긴 졸음을 깨웠나 싶다. 쌀알 크기의 방울이 가지 끝에서 살며시 인사를 건넨다. 꽃눈의 기운에 끌려 걸음을 멈추고 손을 내밀어 가지 끝을 감쌌다. 한설에 노출되어 고드름만큼이나 차다. 그런데 저 너머의 봄맛이 손끝에서 감지된다. 얼어붙은 고초 속에서 피의 강이 마르지 않도록 숨을 쉬고 있었다. 버티는 게 아니라 미래를 향한 실행이었던 게다. 다음 산책 날에는 생강나무에 다가가 추위를 어찌 견디는지 먼저 안부를 물어볼 작정이다.

진달래와 벚나무가 생강나무를 시샘이라도 하는가. 줄기에 좁쌀 크기의 돌기를 따닥따닥 부풀린다. 외피가 두꺼워도 칼바람을 견디기 어려울 텐데, 하루가 다르게 침묵이 차오르는 비전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가을엔 불타오르는 색채에 눈길을 빼앗겼건만, 하얀 입김 서리는 지금에서야 진경眞境을 접하게 된다. 나날이 변화하는 모양새에 심중이 집중되니, ‘나는 뭐야.’하고 내 삶을 되묻는다.

작은 꽃눈 하나가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험산에 숨은 고찰을 그리는 대회에서다. 절은 저 멀리에서 가물가물, 계곡에서 물동이 지고 오르는 동자승에 초점을 잡은 그림이 장원에 올랐다는 이야기다. 응축된 하나가 전체를 풀어내는 걸작이었다.

나무의 겨울나기를 읽는다. 떨켜라는 특수 세포층이 잎을 떨어뜨린 뒤, 외부로 향하는 문을 걸어 잠그고 최소한의 에너지만으로 한파를 버티어낸다. 그런가 하면 세포벽에 미세한 구멍을 내어 순수한 물만 증발시킨다. 이때 세포에는 당, 단백질, 산이 농축되어 얼지 않는 부동액 역할을 담당한다. 거기에 더해 세포와 세포 사이에 얼음주머니를 품은 세포를 가진다. 일반 세포보다 수천 배나 큰 얼음 세포는 스스로 얼음을 품어서 다른 세포들이 얼지 않도록 보호한다. 얼음으로 얼지 않도록 한다니, 얼음 세포의 역할은 에스키모인의 얼음집과 같나 보다.

얼음 세포의 역할을 숙지하니 선승의 동안거가 선명하게 그려진다. 무념무상 상태로 무아지경에 이르기 위해, 밖으로의 통로를 차단한 채 일백일을 수행하는 활불活佛. 심신을 괴롭히는 분노나 욕망 따위의 번뇌를 버리고, 아무런 감정이나 생각 없이 해탈의 길에 빠져든다. 속세의 온갖 사연이 닿지 않도록 오감의 문을 차단하는 장치가 동안거이리라. 선승에게 동안거는 하릴없는 휴식이 아니라, 참 수행을 위한 도움닫기임을 춘화만발春花滿發을 위해 혹한을 견디어내는 꽃눈에서 감지한다. 세상의 이치를 고스란히 담고 커가는 꽃눈, 너를 바라다보니 움츠렸던 몸이 녹아내린다. 너의 기가 내 게로 전이되었나 보다.

또 하나의 꽃눈이 떠오른다. 얼음판 위에서 가장 뜨겁게 피어난 한 송이 꽃. 빙판 위에서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던 한 소녀. 화려함보다 단단함을 선택한 그녀는 수없이 깨문 어금니와 흘린 땀으로 자신을 벼려냈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 부서지지 않기 위해 매 순간을 불굴의 의지로 자신을 견인했다. 피겨스케이팅 올림픽 챔피언으로 우뚝 서서 한민족의 갈증을 풀어준 금메달리스트. 그녀의 도약 뒤에는 인내로 응결된 얼음 세포가 있었다.

겨울 산은 마음을 데운다. 가지 끝 꽃눈 하나에 대자연의 의지가 오롯이 웅크리고 있다. 나목의 얼음 세포를 읽다 보니, 버틴다는 것은 멈춤이 아니라 가장 깊은 준비임을 알겠다. 나는 무엇을 얼리고, 무엇을 지켜내며 이 겨울을 건너고 있는가. 흔들댔던 마음의 지축이 스르르 바른 자리를 잡는다.

얼음 세포, 자연이 건네는 한 권의 수행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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