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개 팔찌를 차고 / 김정화

조개 팔찌를 찬 인골을 본 적이 있다. 십여 년 전, 가덕도 장항 유적에서 신석기 시대 무덤과 인골이 대거 발굴되었다. 그들은 토기에 덮였거나 돌 덮개 아래서 흙 베개나 돌베개를 베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집트 미라보다도 더 오랜 세월인 7천 년 동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유골 중 일부는 하반신을 상반신과 붙인 굽혀묻기로써 학자들은 이를 두고 굴장屈葬이라 이름 붙였다. 마치 어머니 뱃속의 태아 모습 같았는데 선사인들도 인간이 죽으면 다시 태어난다고 믿었을까.

무덤 주변에는 빗금 진 토기와 옥 장신구와 짐승 뼈 같은 껴묻거리가 함께 출토되었고 미적 감각을 발휘한 각종 꾸미개도 눈길을 끌었다. 그중에서 유난히 강렬하여 잊을 수 없는 유골이 있다. 다리를 접어 배 위에 붙이고 양팔을 교차시켜 얌전히 가슴 위에 올린 남자.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는, 마흔 정도로 추정하는 이 중년 남성의 조개 장신구를 깊이 들여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른팔에 세 개, 왼팔에 다섯 개의 조개 팔찌[패천·貝釧]를 차고 스물네 개의 조개 팔찌를 엮은 목걸이까지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기 때문이다.

투박조개와 피조개로 만든 장신구들은 긴 시간 땅속에 묻혀서도 상아 뼈처럼 매끈거렸고 진주알같이 반드르르 윤기가 흘렀다. 당시의 남자들도 현세의 꽃미남들처럼 겉치장을 하고 멋을 부렸을까. 죽어서도 저렇게 많은 장신구를 걸친 것을 보니 상당한 계급을 가진 자이거나 어쩌면 마을의 호부자일지도 모르겠다.

살아간다는 것은 미래를 향하는 길이지만 과거를 잇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하니 구시대 사람들의 조가비 장식품이 당연히 궁금해진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장신구는 십만 년이 훨씬 넘은 것으로 추정되는 구멍 뚫린 조개껍질 목걸이로써 모로코의 한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문자도 없던 현생인류가 같은 종류의 조개껍질을 일정한 크기로 다듬어 꿰었는데, 유물 사진을 확대해서 들여다보면 자잘한 바다 달팽이 껍질이 구슬 모양으로 키 맞춤을 하고 있다. 그것이 내 눈에는 향긋한 백장미 봉오리가 무더기로 피어오르는 것 같아서, 갯내 나는 조가비에서도 장미 향이 풍길 것만 같은 몽환이 일었다. 이렇게 세련된 디자인의 주얼리가 선사인의 작품이라는 것이 놀랍지만, 시체 위에 꽃을 덮어 줄 만큼 지혜로운 호모사피엔스 화석이 발굴된 곳이니 당연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어찌 먼 아프리카에서만 멋진 장신구를 제작했겠는가. 가까운 우리의 땅인 부산의 영도 조개무지에서도 대량으로 조개 팔찌를 제작하였다는 보고서가 존재한다. 놀랍게도 출토된 조개 팔찌는 무려 천여 점이 넘는다. 특이한 것은 일본에서는 출토되지 않는 이곳 투박조개 팔찌가 규슈에서 나온 적이 있다. 요즈음 표현으로 치면 유명 액세서리 공장이 부산 땅에 있어서, 명품 팔찌를 만들어 바다 건너 섬나라로 수출하였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동안 우리는 선사인을 어떻게 생각하였는가. 초등학교 교과서와 박물관 벽면에 한결같이 전시된 그림을 기억한다. 움집이나 동굴 앞에서 돌칼이나 주먹도끼로 짐승의 가죽을 벗기고 찌르개 같은 도구로 잡은 물고기를 모닥불에 익히는 자들이었다. 맨몸이거나 혹은 나뭇잎을 걸친 겉모습은 걸인처럼 초라하다. 언어나 문자가 없으니 우가우가 괴성이나 지르는 무지한 미개인일까. 그렇게 배워왔고 당연하다고 믿어왔다. 과연 그럴까.

그런데도 석기시대 조개더미 마을에서 저렇게 단단한 투박조개로 특산품을 생산하지 않았는가. 학창 시절 때 누구나 불렀던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물가에 마주 앉아 밤새 속삭이네∼”라는 쎄시봉의 노래를 기억할 것이다. 그때 물가의 아이들은 굴이나 소라고둥이나 재첩 조개나 가리비 껍질에 구멍을 뚫어 목걸이 펜던트를 만들려고 애를 썼다. 겨우 하나의 조개에 구멍만 내면 되는데 밑돌 위에 조개를 놓고 뾰족한 돌송곳을 위에 받쳐 한 손으로 자갈돌을 내려치면 구멍은커녕 껍데기 조개가 와짝 소리를 내며 엉그름 지듯 번번이 갈라졌다.

그러나 그들은 정교한 기계 하나 없이 조개 팔찌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내었다. 아마 정수리 부분을 때려 구멍을 내고 손목에 끼울 수 있게 한가운데를 둥글게 오려내고 바깥 테두리를 다듬고 전체를 갈아 모양을 잡았으리라. 그 어려운 수작업을 척척 잘도 해냈으니 선사인들의 삶이 수렵 채집하는 원시생활이 아니라 오늘날처럼 노동자가 있는 계급사회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때 이 땅의 주인들이 조가비로 애장품을 만들었다는 장소에 가면 늘 친근감이 든다. 조개더미 구릉지대와 조개무덤이 남은 땅에서는 고향 냄새가 났다. 낙동강 하구의 마을 사람들은 봄마다 재첩을 기다렸다. 건장한 남자들은 강 복판으로 재첩을 건져 올리러 가거나 재첩 배를 탔고, 아녀자 대부분은 마을 앞 샛강의 나룻배에서 내린 재첩을 한 자루씩 받아 와서 재첩국 장사를 나갔다. 지금은 먼 나라 사람이 된 내 엄마도 예외가 아니라서 새벽녘이면 재첩국을 담은 양철 동이를 이고 안개가 휘둘린 두렁길을 걸어 읍내로 장사를 나갔다. 언젠가 내가 쓴 글에서 재첩국에는 고향의 강물 냄새가 난다고 한 적이 있다.

유년 시절, 재첩알을 까고 내다 버린 조개껍데기는 집 뒤 공터에 쌓여 야트막한 언덕을 이루었다. 그래서 한밤중에 깊은 잠에 빠졌다가도 누가 외딴 우리 집을 거치는 외길을 지나가면 바싹바싹 조개껍질 밟히는 소리가 났다. 그러니 먼 훗날에 그곳을 발견한 후세 사람들도 조개무지라는 이름으로 명명하고 퍼즐 조각을 맞추듯 우리 가족들의 삶을 밝혀내겠지. 아아, 어쩌면 지구촌 곳곳에 출토된 조개 팔찌를 통하여 현생인류는 모두 연결된 같은 조상이라는 사실을 발견해낼는지도. 몇백만 년 전의 어느 패총에서 인간 최초의 어머니로 추측되는 조개 팔찌를 두른 한 여성의 유골을 출토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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