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전무와 떡볶이 / 피희순

불 켜진 포장마차에 들어서니 직장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옆으로 나란히 서서 뭔가를 기다리고 있다. 넓은 철판 위에는 빨간 떡볶이가 화산 터지듯 복작복작 맛깔나게 끓고 있다.

 

쫄깃하고 매콤달콤한 떡볶이는 나의 소울푸드다. 누군가가 죽기 전에 꼭 먹고 싶은 음식 한 가지를 말하라면 나는 주저 없이 떡볶이라고 말할 것이다. 외국에 머무를 때도 떡볶이는 그리울 때가 많다. 해외여행 갈 때는 포장 떡볶이 하나쯤은 챙겨 나간다.

 

떡볶이는 떡의 주재료가 쌀이냐, 밀가루냐에 따라 쌀떡과 밀떡으로 나뉘고, 추가하는 양념에 따라 무궁무진 변신이 가능하다. 대표 길거리 음식으로 알려진 떡볶이가 때로는 환골탈태하기도 한다. 여러 가지 야채와 버섯, 간장양념에 재운 쇠고기를 만나면 궁중떡볶이로 탈바꿈하여 귀빈들의 식탁에 오르는 영화를 누리기도 한다.

 

돌아보니 우리의 삶도 떡볶이의 변신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인생에 있어서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이와 어울리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변화하고 품격이 달라지기도 한다. 인연의 소중함은 삐걱거리는 수레바퀴를 다스리듯 타인으로 인해 자신을 조율하고 완성하는 데 있다. 똑같은 떡볶이가 길거리 음식이 되기도 하고, 수라상에 오르는 궁중 음식이 되기도 하는 것은 서로 어떤 재료를 만나 잘 버무려지는가에 달려 있다.

 

문득 박 전무가 생각났다. 박 전무를 만난 것은 대학 졸업 후 첫 입사 면접에서였다. 우연한 기회에 외국회사에 입사 면접을 보게 되었다. 그때는 지금 대학생들같이 치열한 입사 경쟁을 치르지도 않았고, 회사에 꼭 들어가야 한다는 절박함도 나에게는 없었다.

 

박 전무는 깡마른 체구와 무뚝뚝함에서 풍기는 첫인상이 무척이나 깐깐해 보였다. 책상 위 재떨이에 소복이 쌓인 담배꽁초가 그를 대변했다. 첫 상사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최악의 상사일 거라는 생각이 사라지기도 전에 박 전무는 그 자리에서 바로 입사 제의를 했다. 무슨 인연인지 홀린 듯, 나는 입사 계약서에 사인하고 말았다.

 

첫 면접, 첫 직장, 첫 상사.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었다. 사회초년생 신입에게는 하늘같이 높아 보이는 나의 첫 상사, 최악의 상사로 생각했던 박 전무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내가 사회생활을 하고 인생을 사는데 초석을 다져준 귀한 인연이다.

 

S대를 나온 그는 통계분석 전문가다. 부서 직원은 박 전무와 나, 단 두 명. 그는 나의 유일한 상사이고 나는 그의 유일한 부하 직원이었다. 그는 회사에서도 깐깐한 업무처리와 탁월한 두뇌의 소유자로 소문이 나 있었다. 신입에게도 걸맞지 않은 많은 일을 쏟아부었다. 업무지시는 간결하고 쉬워도 갓 입사한 나로서는 밤을 새워도 감당하기 벅찬 일들이었다.

 

박 전무는 자상하게 일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책 한 권을 던져주는 것으로 그 설명을 다 하였다. 신출내기인 내가 한없이 답답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말없이 기다려 주었다. 그는 내 능력의 크기를 본 것이 아니라 숨은 잠재력을 보았던 것 같다. 필요하면 더 높은 시렁에 있는 큰 항아리까지 스스로 꺼내라고 했다.

 

어릴 적 마루 시렁 위에 있는 항아리에 뭐가 들어있을까 궁금하여 까치발을 하고 안간힘을 썼던 기억이 떠올랐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능력은 하나씩 깨어났고 불가능한 일들을 가능하게 했다. 나는 더 많은 책을 읽어야 했고, 대학에서 배우지 않은 수많은 통계기법과 이론서를 혼자 익혀야 했다.

 

평소 무뚝뚝하고 칭찬에 인색한 그에게서 어쩌다 듣는 짧고 담백한 한마디는 나의 자존감을 높여주기에 충분했다. 대쪽 같은 성격에 무뚝뚝하고 잔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어 보이는 그가 마지막으로 회사를 떠나던 날,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내가 얼마나 아끼는지 알지? 지금 잘하고 있어.”

박 전무의 매운 고추 맛 시집살이는 그 후로도 끊임없이 나를 성장시켰다. 그동안 내 이력서를 장식해줄 성적표에 도취되어 영리한 척, 잘난 척, 자만에 빠져 있었다. 회사 업무를 통해 지금까지의 얕은 지식과 대학에서의 성적표가 얼마나 가치 없는 종이쪽지에 불과한 것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그의 저서 ≪인간의 품격≫에서 인간의 삶이란 결함 있는 내면의 자아와 끊임없이 투쟁하며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에 불과했던 나는 박 전무를 만나 내적으로 더 단단해지고 점점 빛이 나기 시작했다.

길거리 음식에서 궁중떡볶이로 품격을 달리하는 떡볶이의 변신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고 인연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성찰의 자세로 더 세상을 배워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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