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리고 갈 것이 그것뿐이랴
박 유니스
집을 줄여 이사 가기로 했다.
옮겨 갈 집을 정한 뒤, 나는 나 자신에게 방하착을 선언했다. 먼저 가구를 정리해 가져갈 것과 버릴 것을 가르고, 그다음 자잘한 가재도구들을 하나씩 없앴다. 옷장마다 쌓여 있던 옷가지들까지 이리저리 보내고 나니 집 안이 전보다 훨씬 말끔해졌다. 그만 이 집에 눌러살까 하는 마음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오래된 편지와 서류들, 갖가지 상패까지 모두 정리하고 차고로 나갔다.
차고에는 삼십여 년에 걸쳐 모아 온 엄청난 구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걸어 온 시간이 그곳에 있는 듯했다. 사십 대 이후 체중은 늘었다 줄었다 했지만, 발의 크기는 크게 변하지 않아 굳이 구두를 버릴 이유가 없었다. 거기에 더해 구두에 대한 나의 유별난 집착까지 보태어져 신발장 세 개가 가득 찼다.
정장 구두와 평상복 구두, 샌들, 등산화, 조깅화, 댄스 구두, 골프 구두들이 색깔별, 계절별로 즐비했다. 그 옆에는 짧고 긴 목의 밤색, 자주색 부츠들이 서 있었다. 아들과 딸의 결혼식 때 신었던 화사한 비단신도 기념처럼 간직해 두었다.
신발장 깊숙이 검은 구두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남편의 구두였다. 병원에 마지막으로 들어가던 날, 힘겹게 구두를 챙겨 신고 차에 오르던 그를 보며 이 사람이 저 구두를 다시 신을 수 있을까 하는 싸한 아픔이 밀려왔다. 남편은 끝내 그 구두를 다시 신어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나는 『수상록』에 나타난 몽테뉴의 죽음에 대한 사유와 단상에 대부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한 구절만은 선뜻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사정이 허락하는 한 언제나 신발을 신고 떠날 채비를 해야 한다.”
죽음이란 그런 채비를 허락하지 않는다. 어느 날 문득, 아무 준비도 없이 우리 앞에 다가온다. 결국 우리는 신발 한 켤레도 신지 못한 채, 맨발로 길을 떠나야 한다.
천국 환송 예배에 그가 입을 옷을 챙기며 생전에 신던 구두를 정성스레 닦아 함께 넣어 보냈다. 심부름하러 갔던 이가 구두만 다시 들고 돌아왔다. 망자에게는 신을 신기지 않는다고 했다.
아아, 그 길은 대체 얼마나 평탄하기에, 낯선 길을 처음 떠나는 이에게 신조차 신겨 보내지 않는 것일까. 장애가 있던 남편이 불편한 맨발로 그 먼 길을 어찌 홀로 걸어갈까. 생각할수록 슬픔을 가누기 어려웠다.
남편은 평발이었다. 결혼 후 오래도록 나는 그의 장애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날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아들이 네 살 무렵이었다. 집 앞 골목에서 놀고 있는 아이 뒤로 커다란 트럭 한 대가 후진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이 층 창문에서 내려다본 순간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거리는 너무 멀었고, 아이와 차 사이의 간격은 절망적이었다.
그때 퇴근해 오던 남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남편은 필사적으로 아이를 향해 뛰었다. 그 순간, 나는 비로소 그의 몸이 가진 한계를, 그리고 그 한계 속에서도 아이를 향한 온전한 사랑을 깨달았다. 아이의 절체절명의 위급한 순간에도 그렇게밖에 속도를 낼 수 없는 그의 신체적 한계를.
남편은 자신의 불편함을 일상에서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몸의 핸디캡을 의젓하게 감내하며 최선을 다해 살았다. 나는 그런 남편에게 늘 빨리빨리 재촉하며 성급하게 굴곤 했다. 신혼 초에는 천천히 걷는 그의 걸음이 무척 멋있어 보였지만, 시간이 흐르자 남보다 느린 걸음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잰걸음으로 앞서가며 재촉하듯 뒤를 돌아보곤 했다.
땀에 흥건히 젖은 남편의 품에서 아이를 받아 내 품에 안던 그 순간, 그에 대한 안쓰러움과 미안함이 가슴 깊이 밀려왔다.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우리는 단 한 켤레의 신발도 신고 갈 수 없다. 그러나 가져갈 수 없는 것이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평생 모아두었던 물건들, 붙잡고 살았던 자존심과 후회들, 미처 다 전하지 못한 마음들까지 모두 이 땅에 남겨두고 가야 한다.
남편이 떠난 뒤에도 십 년 넘도록 간직해 온 그의 구두.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가슴 설레며 신어 보고, 거울에 비추어 보며 사 모아 두었던 나의 집착들. 이제 하나둘 내려놓는다. 그리고, 맨발로 떠날 그 길을 생각한다.
잘 읽었습니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사람들, 단 한 켤레의 신발도 신고 갈 수 없는 우리들 이네요.
하나 둘 내려놓고 집착도 버리고 맨발로 떠날 그 길을 생각한다는 선생님의 글에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