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미가 어느 날 불현듯 사라졌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흔들림이 가시자 숲길을 걷는 듯 머리가 맑아졌다.
멀미에 시달릴 때는 차가 비포장도로를 달릴 때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고요히 정박한 배가 겉보기엔 안정된 듯 보여도 속은 여전히 파도에 흔들리듯, 집 안에서도 나는 늘 출렁였다.
멀미가 찾아온 건 은퇴 이후였다. 직장을 그만둔 뒤 몇 달은 새처럼 가벼웠다. 새벽부터 서두르지 않아도 되었고, 성과를 내야 한다는 무거운 짐도 벗었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세상에서 나의 쓰임이 다했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이제 난 사회에 쓸모를 다한 사람인가? 인생은 아직 반이나 남았는데, 무얼 하며 살아야 할까?’ 불안은 빈틈마다 스며들었고, 아무 할 일 없는 시간이 많을수록 증상은 심해졌다. 생각은 쉴 새 없이 달렸지만, 몸은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땅 위에 서 있으면서도, 나는 늘 파도 위에 있는 듯 위태로웠다.
그럴 때면 습관처럼 시계를 보았다. 지금쯤이면 누군가는 출근길을 달리고 있을 시간, 회의가 끝나고 커피를 마실 시간, 점심을 고민할 시간. 수십 년 동안 분 단위로 움직여 온몸은 여전히 정확히 시각을 짚었다.
그러나 나는 텅 빈 시간 앞에서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평일과 주말이 구분되지 않는 하루와 알람이 울리지 않는 아침, 회의와 미팅이 사라진 달력 앞에서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불안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쉼조차 경쟁처럼 소비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여행을 가도 ‘인증’을 해야 하고, 취미를 가져도 ‘성과’를 내야 한다.
유튜브에는 은퇴 이후 또 다른 성취를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들이 끝없이 흘러나온다. 멈춤은 게으름으로 오해되고, 고요는 무가치함으로 낙인찍힌다. 그런 세상에서라면, 은퇴 뒤의 멀미는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증상일지 모른다.
나를 붙잡아 준 건 책이었다. 활자를 따라가다 보면 마음의 호흡이 고르게 돌아왔다. 뜻밖에도 위로가 된 건 눈부신 성공담이 아니라 흔들림의 기록이었다. 왕도 왕위에서 내려와야 했고, 빛나던 스타들도 언젠가는 무대의 불빛을 잃는다. 모두가 겪는 일이었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시간을 살아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자, 나의 불안이 특별할 리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어디선가 읽은 문장 하나가 오래 마음에 남았다.
“나는 특별하지 않다. 다만 소중할 뿐이다.”
그 말을 곱씹자 파도는 잦아들었다. 특별해야 한다는 강박이 내 삶을 더 흔들었을 뿐이었다. ‘소중하다’는 감각은 마음 깊은 곳에서 잔잔히 닻을 내려주었다.
그 후 나는 작은 습관들을 만들었다. 아침마다 몸을 풀어주듯 요가를 하고, 떠오른 생각이나 책 속의 문장을 노트에 적는다. 별것 아닌 듯 보이지만, 작은 반복이야말로 마음의 닻이 된다. 음악을 듣거나 지인과 나누는 짧은 대화 속에서도 흔들림은 가라앉았다. 삶의 균형은 언제나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들에서 되찾아진다.
멀미는 몸과 감각이 서로 다른 말을 할 때 찾아온다. 눈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귀는 ‘흔들린다’고 속삭인다. 뇌는 그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어지럼과 구토로 반응한다.
은퇴 뒤의 삶도 그랬다. 몸은 갑자기 멈췄지만, 마음은 여전히 일터의 속도를 기억했다. 사회에서 나는 특별하다고 여겼지만, 은퇴 후 평범한 현실 앞에서 나는 존재감을 잃고 흔들렸다.
멀미에 시달리는 게 나 만일까. 은퇴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전환기마다 멀미를 겪는다. 낯선 도시로 이사할 때, 오래된 관계가 끝날 때, 예기치 못한 변화 앞에서 발밑은 파도처럼 흔들린다.
멀미가 찾아올 때 잠재우는 방법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창을 열어 시원한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고,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듯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응시한다. 그리고 작은 일상을 이어간다. 마지막으로 나 자신에게 말해준다.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다들 그렇게 산다고, 다만 나는 소중할 뿐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