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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 / 이건청

 

내가 멸치였을 때,

바다 속 다시마 숲을 스쳐 다니며

멸치 떼로 사는 것이 좋았다.

멸치 옆에 멸치, 그 옆에 또 멸치,

세상은 멸치로 이룬 우주였다.

바다 속을 헤엄쳐 다니며

붉은 산호, 치밀한 뿌리 속을 스미는

바다 속 노을을 보는 게 좋았었다.

내가 멸치였을 땐

은빛 비늘이 시리게 빛났었다.

파르르 꼬리를 치며

날쌔게 달리곤 하였다.

싱싱한 날들의 어느 한 끝에서

별이 되리라 믿었다.

핏빛 동백꽃이 되리라 믿었었다.

멸치가 그물에 걸려 뭍으로 올려지고,

끓는 물에 담겼다가

채반에 건저져 건조장에 놓이고

어느 날, 멸치는 말라 비틀어진 건어물로 쌓였다.

그리고, 멸치는 실존의 식탁에서

머리가 뜯긴 채 고추장에 찍히거나,

끓는 냄비 속에서 우려내진 채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내가 멸치였을 때,

별이 되리라 믿었던 적이 있었다

 

 

 

단순한 생태적 비유를 넘어, 존재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추락을 아주 냉정하게 보여주는 시입니다. 이 시의 강점은 ‘멸치’라는 하찮고 일상적인 존재를 통해 인간 실존 전체를 압축했다는 데 있습니다. 감상적으로 흐르지 않으면서도 마지막 행에서 강한 허무와 비애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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