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몸짓 / 왕린
장마 그치고 반짝 해가 든 날, 오랜만에 산길이 환하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어룽어룽한 무늬를 만들어 물결처럼 흔들린다. 그 물결 따라 걷던 나는 발끝에 감도는 미세한 기운에 붙들려 걸음을 멈춘다.
한쪽 다리가 없는 대벌레 한 마리가 길바닥에 엎드려 있다. 살아 있으면서도 이토록 완벽하게 숨을 비울 수 있다는 것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작은 생명이 온몸으로 뿜어내는 정적이 나를 불러 세운 것이다.
그때부터 내 걸음이 조심스러워진다. 발밑을 살피자 숲길 여기저기 가녀린 것들이 눈에 띈다. 죽은 듯 꼼짝 않고 땅에 붙은 대벌레는 무심히 지나가는 발길에 밟히면 무사할 수 있을까. 나는 보이는 족족 녀석들을 들어 올려 덤불 속으로 옮겨준다.
대벌레의 몸은 대나무처럼 마디가 있고, 가늘고 긴 다리는 풀숲을 헤치기엔 위태로울 만큼 연약해 보인다. 위협을 느끼면 몸의 일부를 스스로 떼어내며 죽은 척한다지만, 숨조차 삼킨 고요가 그곳에서 가장 생생한 움직임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대벌레는 사람들에게 흔히 해로운 존재로 불린다. 나뭇잎을 갉아 먹고 작물을 망친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이 생물을 단순히 해롭다는 말로만 정의할 수 있을까. 수풀 어딘가로 그림자처럼 몸을 옮기는 그 움직임은, 누군가를 해하려는 공격이 아니라 오직 자신을 지켜내려는 절박한 생의 전략에 가깝다. 숲에서 살아남는 법을 이미 온몸으로 익힌 그 지혜로운 숨죽임을, 나는 차마 해롭다고 몰아세울 수 없다.
대벌레를 바라보다가 사람들 또한 저마다의 방식으로 하루를 버티고 있다는 생각이 스친다. 전혀 다른 생이지만 소리 없는 안간힘이라는 결만큼은 닮아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세상은 어쩌면 자신만의 자리에서 견디는 낮은 몸짓들에 기대어 흘러가는 게 아닐까.
상념을 지고 걷다 또 하나의 생 앞에서 멈칫한다. 집어 올리니 이미 형체가 흐트러져 있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무게 없는 죽음 앞에서 오히려 내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는다. 그제야 나는, 나를 지켜내겠다는 이유로 무엇을 포기해 왔는지 돌아본다. 어쩌면 나는 대벌레보다 먼저 죽은 척하는 법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불안을 숨기고 상처를 감춘 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견뎌온 날들. 겉은 멀쩡해 보여도 창틀의 먼지처럼 쌓이는 외로움을 털어낼 방법을 몰랐다.
미동 없이 버티던 그 생명들 때문에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시선은 자꾸 바닥으로 돌아온다. 엎드린 대벌레를 조심스레 들어 숲 안쪽 깊숙한 곳에 내려놓는다.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닌데, 몸에 손을 대는 순간 번개처럼 떠오른 생각에 주춤한다. 마치 눈먼 이를 돕겠다며 불쑥 팔을 잡았을 때처럼, 나의 일방적인 선의조차 준비되지 않은 존재에게는 공포가 될 수 있음을 그제야 깨닫는다. 진심을 건네는 일은 본디 조심스럽다.
작은 숨탄것 하나 앞에서도 생각이 이토록 복잡한데, 나에게 마음을 내주던 이들은 얼마나 많은 질문을 지나왔을까. 힘들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꾹꾹 눌러 감춘 내 침묵을 먼저 알아봐 준 분들. 거창한 위로의 말을 꺼내지 않아도 집 가까이 찾아와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셔주던 그 소소한 일만으로 충분했다. 무엇을 해주었다는 의식도, 생색도 없이 건네준 온기 속에 덧난 상처가 아물고 감정의 잎에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조용히 버티던 나를 알아보고, 숲 한구석 가장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놓고 간 그 다스운 배려 덕분에 다시 나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게 되었다.
다정한 이들의 관심이 내 마음의 굳은 결을 흔든 뒤로, 주변 사람들의 모습이 조금씩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사소한 일에도 날카롭게 반응하는 이들을 피하고만 싶었으나, 이제는 그들 안의 치열한 버팀이 먼저 읽힌다. 상처받지 않으려는 몸부림, 소중한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초조함. 그것은 나약함을 들키지 않으려 숨어 지내온 나의 처지와 다르지 않았다. 누군가 말없이 버티고 있다면, 그 밑바닥에 흐르는 필사적인 사투가 결코 남의 일로만 보이지 않는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다.
삶이 꼭 거창한 성취나 극적인 순간들로만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매일의 바른 습관과 사소한 기쁨들이 어우러져 한 사람의 얼굴이 되고 인생의 무늬가 된다. 대벌레의 정지 또한 단순한 무력함이 아니라, 삶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는 숭고한 몸짓이다. 멈춘 듯한 걸음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한참 뒤에야 알게 되겠지만, 살아내는 일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귀하고 무겁다는 것을 외면할 수 없다.
바람 한 점 없는 숲에서 움쩍 않고 자신을 지켜내던 대벌레의 모습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천천히 발을 옮긴다. 발밑의 흙과 내 호흡을 느끼며 걷는 일이 새삼스럽다. 이름조차 낯선 생명들이 주어진 몫을 다하기 위해 쏟아부은 무수한 시간이 내가 지나온 길 위로 켜켜이 쌓여 있는 듯하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제 자리를 감당하는 존재들 곁에서, 나 또한 오늘을 건너는 중이다. 이제는 내 안의 적막과 숨죽인 시간들조차 외로움이 아닌, 생을 지키려는 지극한 몸짓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